▮정년기념논문집 증정식 답사 (1991년 11월 27일 고려대학교 인촌기념관)
논문집 <작은 정부를 위한 관료제>를 대하며 우선 생각나는 것은 작은 행정부를 역행하는 행정환경의 부조리입니다. 제가 일생동안 관심을 가져온 세 분야 기독교 / 대학 / 나라 이 셋이 곧 행정환경이기도 합니다.
꾸준함이 관심의 심도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저는 지금까지도 어릴 때부터 다녀온 교회에 나가고 있습니다. 18세 젊은 나이에 전문학교 1년생으로 입학하여 오늘 교수정년을 맞이하는 이 시점까지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 한교 고려대학교에만 있었습니다. 정부압력에 의한 3회에 걸치는 해직과 옥고는 나라 정치에 대한 저의 관심을 표현합니다. 이 점에서 학문상 긴 연대를 가지고 있을뿐 아니라 제가 공부하는 행정학의 학회 회장으로 계신 안병영교수 또 저와 영어생활를 같이한 金大中 민주당 대표 최고위원 두 분께서 축하해 주신 것을 뜻있게 생각하며 감사합니다.
그런데 세 곳 행정환경은 오늘날 거의 수습불능의 상태에 있습니다. 교회는 진리와 도덕을 가르쳐서 이 나라 사람들을 인도하지 않고 교권확대와 주술적 축복위주의 신앙을 강조합니다. 오늘의 대학은 조건없는 기부금을 만인으로 부터 받을 정도로 공정하지도 않고 비공개적입니다. 대학은 대학생의 입학과 기여금 지불의 교환을 공공연히 대안으로 내세울 정도로 타락해 있습니다. 정치는 통치정당성의 결핍을 엄청난 체제유지비 사용을 통하여 메꾸고 있습니다. 이 결과로 하나는 기업의 기술개발비를 빼앗아 무역입국의 길을 막고 있으며, 둘은 통치권이 물가고 과소비 사치 등의 장본인역을 하며 나아가 경제분배를 始原的으로 가로막고 있습니다.
세 가지 행정환경에서 모든 것이 가히 공동체 붕괴직전을 치닫고 있는 이 삭막한 행정환경 속에서 공무원의 권한남용이 억제될 뿐만 아니라 이 시대가 요구하는 과제인 정치 및 경제적 민주주의 그리고 민족의 통일에 기여하는 행정부가 형성되기 위하여, 적어도 다음 다섯가지의 조치가 진지하게 강구되어야 합니다.
우선 하나는 오늘의 공무원들은 법준수를 뼈에 사무치도록 교육받아야 합니다. John A. Rohr 교수가 <관료를 위한 윤리>라는 책에서 제시한 말과 같이 고급공무원은 자유, 평등, 재산권의 존중 등을 현법과 법철학적 차원에서 심층적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둘은 공무원간의 공식적인 관계가 재구조화되어야 합니다. 행정부내의 분권화와 국회의 강화가 시급합니다. 한 예를 들어 감사원은 국회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청와대와 안기부 감사 같은 것을 안하거나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셋은 상하간의 교섭관계가 권위주의적인 오늘날, 아무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개인들 사이에서 합의를 모색하며, 합의된 것을 높은 사람도 지키는 間主觀 文化가 필요합니다. 아랫 사람은 자신의 문제를 상사에게 노출안시키며 지신의 업적을 과대선전합니다. 목표관리 MBO 제도 같은 것은 아예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넷은 오늘의 공무원은 국민의 요구에 순응적이어야 합니다. 주택을 세웠다 하면 토지를 저렴하게 수용해 수익을 내서 비실수요자에게 판매하지를 말고 건축비의 일부를 정부가 부담해 건축물을 저소득층에 분배해야 합니다. 사회형평과 사회윤리의 결핍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또 하나의 예가 현주민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고 재벌위주로 제주도를 개발하는 일입니다.
끝으로 오늘의 공무원은 물건과 부당한 정치에 매여서만 사는 노예이지, 훌륭한 우리 선인들 모양으로 혼자서 조심하며 자기의 뜻을 안 굽히는 愼其獨의 세계에 살고 있지를 않습니다. 철학과 윤리와 고전은 공무원의 애독서가 이미 아닙니다.
이상은 며칠전에 한 저의 종강 강의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돌이켜 볼 때에 제가 6.25당시 강원도 산골에 있을 때 저에게 편지를 보내신 제 아버님의 遺訓 "공명과 명예의 노예가 되지 말고 초월하라"는 말씀을 곰곰히 생각하게 됩니다. 이 세상의 척도가 제공하는 즐거움이 아니라 정신이 제공하는 즐거움을 더욱 희구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저의 책임을 다하도록 여러분께서 도와주시며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 정년의 모임을 제가 존경하는 인촌선생님을 기념하는 아름다운 건물에서 하게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일제시 전문학교 일학년생 이었을때에 인촌선생님을 처음으로 뵈었읍니다만, 저는 그분이 학교의 정원사인 줄 알았읍니다. 한번은 운동장둘레의 나무를 전지하시다가 제 담임선생이신 장덕수 교수께서 출근하시는데 깍듯이 인사하시는것을 뵈었기 때문입니다. 제 정년을 맞이해 생존해 계신 제 은사 선생님을 몇 일전에 일단 다 찾아 뵈었읍니다만, 그 당시 박극채, 윤행중, 김해균 등 좌파학자들과 장덕수, 손진태 등 우파학자들을 다 거느리고 계신 거물 인촌선생님이었습니다.
거듭 축사를 해 주신 두 분, 바쁘신 시간에 이 자리에 오신 여러 어른들, 친구들, 이 책을 집필하신 동료학자들, 책에 저를 書生典範 모범적인 書生이라고 과찬의 글씨를 써 주신 金忠烈교수, 법문사 裵孝善사장, 이 모임을 오래 전에 계획하며 끈질긴 열심과 성의로 주선한 동료교수와 변변치 않은 스승을 위하여 애를 쓴 제자, 제가 글 쓸 때면 잘 듣는 FM 음악과는 다른 의미를 부여해 준 제자들의 음악, 그리고 제자들--검찰청 에레베이타에서 수갑을 차고 오라줄에 묶여 있는 저를 만난 제자의 눈에 고이던 눈물을 지금도 기억하며 이런 분들의 성의가 오늘의 이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이 모든 분들께 감사하며 하나님의 가호하심이 같이 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종강한 다음날인 91년 11월 18일(화) 새벽에
▮김대중 전 대통령 붕어(경향신문 2009년 8월 18일)
뉴스 시간을 안 놓치는 버릇이 있는 제가 이번에 후광이 입원하신 후에는 뉴스를 안 듣는 새 버릇이 생겼었습니다. 나쁜 소식을 들을까봐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조바심이 한낱 소용없는 짓이 되고 말았습니다. 드디어 가셨으니까요.
후광의 일을 이렇게 미리 안 일이 몇 번 있었던 생각이 납니다. 군사법정에서 후광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도 그 하나였습니다. 저는 후광이 무사할 것이라고 미리 확신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하나만 더 미리 안 것을 적겠습니다. 대선에서 투표했을 때 제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으면서 저는 미리 아는 것이 있었습니다. 접은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을 때 저는 ‘이번에는 당선된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투표하던 저는 기뻐서 울음이 나왔고 후광을 이제는 정치의 고해바다로 내보내는 감을 잡아 울었습니다. 기쁨과 슬픔이 다 울음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느님이 후광을 이제는 이 땅에 그만 두고자 하시는 이 시점에서 저는 후광의 명복을 비는 마음으로 후광이 하느님 앞에서 떳떳하게 자신을 변명할 수 있는 것이 있으니 하느님 앞에서 무서워 떨지 말고 담대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본 후광의 하느님께 자랑할 만한 한 가지는 1970년 이 겨레를 위하여 ‘대중 경제론’과 ‘4대국 보장론’을 펴신 일입니다. 이 두 가지의 주장은 군사 정부가 못 말하는 주장이었습니다. 군사정부는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평양에 보내 7·4 공동성명을 냄으로써 두 독재자가 한반도의 평화를 보장하고자 했습니다. 유신정부는 대중 경제가 싫어 노동자를 편들기만 해도 구속하는 국가보위법을 제정했습니다. 두 가지 주장 때문에 후광은 세 번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이 두 가지 시책은 오늘에는 유효한 정책이며 통일 후에도 유효할 시책입니다. 즉 이 땅의 가난한 사람을 주축으로 해 경제를 돌리며 한반도의 평화를 6개국이 보장하는 것은 어찌 보면 후광의 정책이 아니라 하느님이 이 땅을 위해 마련한 정책이었습니다. 이 두 개의 시책 때문에 후광은 대통령도 되고 노벨상을 받으셨습니다. 후광이 대통령이 되신 것은 아시아 정치권에서 처음 보는 정권 교체였습니다.
그러니 후광은 이 땅에서 후광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하시다가 가셨습니다. 부디 후광이여, 긍휼 많으신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길이 받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