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n Young Lee

월간
 
최소주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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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선생님은 구민법의 대상이 되거나 세금을 내지 않으면 숫제 선거권을 주지 않는 제한선거제도를 채택했더라면 우리나라 정치가 훨씬 나아졌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2008: 219). 어느 수업시간이었는데, 당시 나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른바 보통 ·평등·직접·비밀 선거라는 원칙에서 벗어나는 말씀이셨기 때문이다. 인종, 지역, 성별, 교육, 소득 등에서 차별을 두지 않는 보편선거(universal suffrage)가 상식에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원칙은 원칙이 아니라 주입된 이념에 가깝다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다.

내가 후원금을 내는 이유

나는 몇년 전부터 참여연대를 비롯한 몇몇 사회단체에 후원금을 내고 있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꾸준함을 깊이 새겨 매달 꼬박꼬박 내려고 한다. 또 <너흰 아니야>와 <이게 나라냐 ㅅㅂ>를 만든 윤민석씨의 “감동후불제”에 동참했다. 지난 해 촛불집회에 조카와 함께 참석해서 기꺼이 촛값을 내고 왔다. 촛불집회에 가면 일당 5만원씩 준다는 음흉한 뜬소문을 옮겨온 아버지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5만원을 모금함에 넣었다.

학생 시절에는 호주머니가 가벼우니 이런 일을 하기가 어려웠다. 애초부터 내 일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이제는 취직도 해서 좀 여유가 생겼으니 말하자면 호기浩氣를 부린 셈이다(사실은 마음이 문제지 돈이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후원금을 내는 이유는 단지 호주머니 사정이 달라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수많은 촛불을 지켜보면서 느낀 것이 있었다. 2009년 “노무현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는 마음이 울었다. 김대중과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켜 놓고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방심했던 것을 뼈저리게 반성했다. 이명박근혜 시절을 절망으로 보내면서 무책임했던 유권자였음을 자책했다. 한국을 떠나와서 벌어진 일들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발만 동동 굴렀던 안타까움이 있었다. 큰 빚을 졌고 그 빚이 묵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치를 것은 치르고 내 몫을 요구해야

그러던 터에 선생님의 <겁많은 자의 용기>(1986)에서 “치를 것은 치르고 자기의 몫을 늘려 나가는, 경우에 맞는 성장을, 한 개인에게서나 국가에서나 보고 싶은 것이다”(62쪽)를 읽었다. 치러야 할 것을 치르지 않고 내 몫을 기대했다는 뉘우침이 있었다. 손 안대고 코를 풀어보려는 심보랄까. 경우에 맞지 않는 짓을 했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소정 선생님은 사람(정치), 돈(경제), 지식(문화)에 관한 좋은 의식이 사회에 퍼져야 한다고 했다(1986: 64). 미움과 박해와 빼앗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봉사와 나누는 마음을 품고, 연줄을 대거나 요행수을 바라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고, 지식을 위한 지식이 아니라 쓸모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한마디로 행동을 하는 일”이라고 했다(64쪽). 봉사활동을 하거나 사회단체에 참여하거나 후원금을 내는 일을 언급했다. 그동안 민주주의를 말했지만 나는 그것이 공짜가 아님을 피부로 느끼지 못했다. 피흘린 대가가 있어야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음에도(2001: 16) 어리석게도 나는 감나무 밑에서 입을 찢어져라 벌리고 홍시가 떨어지길 기다렸다. 상식과 원칙과 정의를 갈구했지만 “행동을 하는 일”에 한없이 게을렀음을 알고 고개를 떨구었다.

선생님은 또 제한선거를 말씀하시면서 “당비를 내는 [지방의원 입후보자] 선거인단이 극소수인 것을 발견하고 의사표시만 앞세우고 회비 지출 의무를 안 지키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결핍을 안타깝게 생각했다”고 적었다(2008: 219).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금·당비·후원비를 안낼까 자문하고, “국민 일반이 더럽게 벌었기에 깨끗한 데 돈을 못 쓴다”고 답했다(219쪽). 돈을 더럽게 번 사람은 자신을 타락시키거나 세속의 복(줄서기나 횡재)을 비는데 돈을 쓴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비·당비·후원회비를 잘 내는 나라치고 돈 못버는 젊은이들이 백화점에 얼씬거리기라도 하는 나라가 있는지를”(220쪽)이라고 한탄했다. 유권자가 치를 것을 다 치르지 않고(책임과 의무는 나몰라라 하고) 민주주의를 기대했다는 뜻이다. 뼈아픈 지적이다. 매달 글을 써서 올리고 후원금을 내는 것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행동하는 일, 경우에 맞는 행정

경우境遇는 사리事理나 도리道理를 말한다. 경우에 맞는 일은 이치에 합당한 일이다. 지난 9년이 참담했던 까닭은 경우에 어긋나는 일을 너무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국가안보와 한미동맹을 핑계삼아 전시작전권 환수를 차일피일 미뤄놓은 군면제자들이 유사시에 원점타격을 하겠다며 기염을 토하는 일도 경험했다. 하물며 대통령이 엽기·변태 행각으로 파면되어 감옥으로 끌려간 판에 적폐청산과 국정농단 조사를 두고 정치보복 운운하는 일임에랴... 소위 “갑질”이라는 것 역시 경우없기는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정부 관료제에서 경우에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 안타깝다. 천둥벌거숭이들이 권력을 남용하여 관료제의 전문성과 중립성이 무너진 것이다. 그런데 고삐풀린 정부는 원래 좋은 말로 다스려지지 않는다. “民의 좋은 행동을 官이 배우며 官의 나쁜 행동을 民이 배운다. 이 말은 원래 官은 좋은 행동을 할 능력을 안 가졌다는 것이기도 하다”(1991: 29). 그동안 경우없는 정권에서 댓글을 달아 여론을 조작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권력과 재물을 탐하는 民(관변단체 등)을 타락시켰음이 드러나고 있다.

합리성을 갖춘 행정은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광화문을 포함한 전국에서 타오른 촛불의 물결이 준 교훈이다. 관료제에서 옳지 못한 경우를 바로잡는 것은 결국은 백성의 몫이다. 주인으로서 경우에 맞는 행동을 보여줘야 한다. 유권자가 제 몫을 요구하기 전에 치러야 할 경우에 맞는 값이다. 좋은 기사를 읽고 토론하고 촛불을 들고 후원금을 내는 것으로도 족하다. 이러한 “좋은 의식”과 “좋은 행동”이 못된 官을 바로잡을 수 있다. “경우”의 기준을 세워나가면서 경우에 맞는 행정을 만들어갈 수 있다.

인용하기: 박헌명. 2017. 행동하는 일과 경우에 맞는 행정 <최소주의행정학> 2(10):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