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n Young Lee

월간
 
최소주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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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지 1년이 넘었다. 그동안 완전한 한반도 비핵화와 적폐 청산을 기치로 숨가쁘게 달려왔다. 올해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이 성사되어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기소되고 적폐세력들이 줄줄이 검찰조사를 받고 있다. 하지만 최근 국내 상황은 녹록치 않아 보인다.

문재인 정부의 힘겨운 “여름나기”

문재인 정부가 일자리 창출을 강조했지만 실업률은 2014년 이후 3%대에 머물다가 올해 4%대로 올라섰고, 특히 청년실업률은 9%대에서 얼마 전 10.5%를 찍었다(연합뉴스. 2018.6.15). 이른바 “취업절벽,” “결혼절벽,” “출산절벽” 등은 벼랑끝에 내몰린 우리의 자화상이다. 소득주도성장정책의 일환으로 내년도 최저임금이 8,350원으로 정해졌으나, 한쪽에선 가파르게(10.9%) 오른 최저임금 때문에 자영업자가 힘들다고 아우성이고 다른 쪽에서는 최저임금에 포함되는 임금 항목이 늘어나 인상효과가 적다고 항변한다. 최근에는 아파트집 가격이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상승하면서 정부가 주택관련 정책을 정비하고 보유세와 종합부동산세를 손질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종부세 강화에 분개하지만 다른 일각에서는 공시가격을 현실화하고 종부세를 더 올릴 것을 주문하고 있다. 리얼미터에 따르면 연초까지 8할대 고공행진이었던 문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이 6월까지 7할대, 8월까지 6할대로 떨어졌고 9월 현재 5할대로 내려앉았다. 민주당 지지율은 연초부터 6월까지 5할대를 유지하였으나 이후 4할 초반으로 내려앉았다.

요즘 분위기는 얼핏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때리기”를 떠올린다. 뜬금없는 “친문패권”에 이어 “제왕적 대통령,” “내로남불(문로남불),” “불통,” “독선,” “코드인사,” “대북퍼주기,” “세금폭탄” ... 흘러간 유행가를 다시 듣는 식상함이 있다. 노무현 문재인은 코드인사라고 비난하면서 이명박근혜가 김기춘을 앉힌 것은 적합한 인사라고 말한다. 노무현 문재인이 주는 것은 “퍼주기”라고 쏘아붙이면서도 이명박근혜가 보낸 돈은 “통일대박” 투자라고 한다. 청와대에서 국민청원까지 받고 있는데도 불통이고 독선이면 이명박근혜는 대체 뭐라 해야 하나?

요즘 수구세력들이 사용하는 단어와 말법은 이성과 상식과 동떨어져 있다. 예컨대, 종부세 인상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9.13 부동산 대책을 발표한 다음 날 김병준씨는 완벽한 실패라고 단언했다. 정책평가가 아니라 비난과 저주 그 자체다. 하물며 “마이너스의 손”이나 “광팔이 정권”과 같은 유치한 칭얼댐임에랴... 연극을 빙자해 육두문자로 노대통령을 욕보인 <환생경제>를 다시 보는 듯하다. 지난 해 읽었던 조기숙의 <마법에 걸린 나라>(2007)와 <왕따의 정치학>(2017)을 다시 펼쳐 든 까닭이다. 촛불혁명에도 불구하고 수구세력의 정신줄은 별반 달라진 것같지 않다.

조기숙의 <마법에 걸린 나라>

참여정부시절 많은 업적을 이루어 놓고도 왜 노무현은 비난을 받았는가? 참여정부가 실패했다는데 왜 노무현의 인기는 오르는가? 왜 진보언론마저도 유독 문재인을 가혹하게 구박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재인의 지지도가 견고하게 올라가는 까닭은 무엇일까? 조기숙은 두 책을 통해 일관된 답을 주고 있다. 진보진영(진보정당, 시민사회, 진보언론)이 세력화하지 못하고 사분오열했고 수구세력과의 담론경쟁에서 밀려나서 국민을 설득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조기숙 2007: 9, 29, 48).

조기숙은 수구언론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프레임을 만들어 마법을 건다고 했다. 프레임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다(32쪽). 국민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담론을 잘 표현하는 프레임을 만들어야 한다. “마법의 유리벽”은 수구언론이 만든 담론 프레임이다. 이 유리벽은 노무현과 문재인의 본래 모습 그대로를 국민에게 보여주지 않고 언제나 수구세력이 원하는 흉칙하고 일그러진 모습으로 국민에게 비춘다(22쪽). 일단 마법에 걸리면 여당이든 야당이든, 수구든 진보든, 정치인이든 지식인이든, 남녀노소가 “노무현 때리기”와 “기승전—문재인”을 즐긴다. 현대정치에서 언론은 담론을 공론의 장으로 이끄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힘센 수구언론이 “마법의 유리벽”을 만들어 낸다. “

이른바 “밤의 대통령이자 어둠의 마왕”이 부리는 이 마법은(42쪽) (1) 프레임 개발, (2) 확대재생산, (3) 기정사실화, (4) 국민들의 확신이라는 얼개를 가지고 있다.

“조선일보가 꼬투리를 잡아 살짝 비틀어놓으면 다음 날 새누리당이 그걸 확대해서 공격했다. 그러면 저녁에 문화일보가 진보진영 시민단체나 지식인들의 인터뷰해서 살을 붙이고, 다음 날 오전이 되면 동아일보가 더 큰 문제로 확대했다. 한 이틀, 때로는 1-2주가 지나면 소위 진보언론이 그걸 기정사실화해서 보도했다”(87쪽).

첫째 단계에서 “조동문”(조선, 동아, 문화일보)으로 대표되는 수구언론이 노무현과 문재인에게 주술을 건다. 예컨대, 친노/반노 갈등, 참여정부 실패, 제왕적 대통령, 호남홀대 등이다(87, 310쪽).

둘째, 수구정당이 언론에 나온 얘기라며 공격을 하고, 수구언론이 참여정부에 비판적인 교수, 연구원, 운동가와 같은 여론선도자(opinion leader)를 동원하여 판을 벌인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조간에 프레임을 만들면 그걸 받아 <문화일보>가 확대재생산하는 순환 홍보”라고 할 수 있다(33쪽). “어떤 쟁점에 대한 합리적인 찬반 토론을 통해 과학적으로 주장이 검증되는 것이 아니라, 몇몇 언론이 주술을 만들면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진보, 보수 진영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그 주술을 읊고 다닌다”(40쪽).

세째 단계에서 드디어 시민단체와 진보언론은 물론 진보정당마저도 마법의 세몰이에 넘어간다. 이 지경에 이르면 “조동문 프레임”이 기정사실화된다. 시민단체와 “한경오”(한겨레, 경향, 오마이뉴스)는 정부를 편든다는 어용시비가 두려워 수구세력의 부당한 비난을 눈감거나 무작정 맞장구를 치거나 수구세력보다 더 가혹하게 비난한다(45-47, 84쪽). 진보 언론인들의 “양심 결벽증”때문이다(조기숙 2017: 114-115). “노무현도 그렇고 문재인도 그렇고, 치명상을 입는 건 좌파언론이 우파언론의 왜곡보도를 확인사살할 때다”(조기숙 2017: 89). 참여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유시민씨 역시 “아홉 개 지지해도 한 개 내 맘에 안드는게 있으면 다 때[리는]” 진보세력이 제일 무섭다고 했다.

또 열린우리당은 끌내는 자신을 옥죄는 줄도 모르고 나서서 참여정부에 흠집을 내고 서로 쌈박질을 해댔다. “영악한 보수언론은 진보진영의 낮은 변별력을 이용해 큰 부끄러움 없이 살아온 참여정부 인사들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먹물을 뿌렸다. 이들에게 돌을 던지며 추방시킨 사람들은 바로 참여진영 인사들이다”(조기숙 2007: 206). 친노/비노/반노 프레임 공격에 맞서기보다는 스스로 친노를 해체했고, 문재인 역시 뜬금없는 “친문 패권”이라는 비난에 시달렸다. “[일일이 대응하기] 귀찮아서 위기를 모면하려고 먹잇감을 대주던 우리당이 통째로 보수언론에 잡아먹히게 된 것”(169쪽)이다. “진보진영은 사분오열했고, 서로 손가락질하며 제 발등 찍기에 바빴”고(48쪽) “열린우리당은 … 보수언론의 장단에 북치고 장구까지 친 것”(149쪽)이다. 조기숙은 “진정으로 뭘 반성해야하는지도 모르면서 보수언론의 주술을 그대로 따라 외면서 국민 앞에 반성한 것이 가장 큰 잘못”(167쪽)이라고 적었다.

마지막 단계는 일반 국민들도 홀려서 주문을 따라 왼다. 진보세력은 물론 진보 운동가, 교수, 언론, 정당까지 다들 그러니까 확신을 가지고 노무현과 문재인을 비난한다. 마법이 현실화된고 완성된다.

“조동문” 마법의 특성

생각을 덛붙이자면 수구세력의 마법은 우선 합리성과 관계가 없다.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논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수구세력이 원하는 결론(비난과 저주)이 있을 뿐이다. 터무니없는 프레임이며 그저 신앙과 종교같은 믿음이다.

둘째, “마법의 유리벽”은 항상 나쁜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 원래의 뜻과 사실을 바꾸기 위해 단장취의, 맥락왜곡, 허위조작 등 가리지 않고 동원한다. 조기숙(2007)은 “언론의 자의적 해석, 과잉비판, 비판을 위한 비판, 말꼬리 잡기, 말 뒤집기, 없는 말 만들어내기는 상상을 초월했다”고 적었다(22-23쪽).

세번째 특성은 차별화을 통하여 목적을 달성한다. 정적을 끌어내려 짓밟는 반면 우군은 띄워주워 기득권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내로남불”은 사실 수구세력의 전매특허다. 노무현과 문재인은 옳은 말을 해도 몹쓸 말을 한 것처럼 매도하고, 이명박근혜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해도 없었던 일로 넘어가거나 미화한다. 문재인은 항상 문제가 있는 것처럼 찡그리지만 박근혜와 안철수는 후광이 비치고 해맑게 그려준다.

마지막으로 수구세력의 마법은 영원히 국민을 홀리고 속일 수는 없다. “마법의 유리벽”은 생각보다 깨지기 쉽다. 이치에 맞는 것도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약발이 오래 가지 못한다. 사실과 진실과 진심은 거짓과 왜곡과 눈속임으로 덮을 수 없다. 똑같은 것을 계속 써먹다 보면 내성이 생겨 잘 먹히지 않는다. 마약과 같은 셈이다. 참여정부 시절 수구세력은 “친노/비노”와 “세금폭탄”으로 재미를 봤지만 이번에는 쉽지 않을 것같다.

“깨어있는 시민”들에게 “조동문”의 유리벽은 마법을 부리지 못한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정치판에서 “마법의 유리벽”과 “왕따”가 위력을 발휘했지만 국민들은 끝내 노무현과 문재인을 버리지 않았다. 김수영이 노래했듯이 풀은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더 빨리 울지만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웃는다.

“조동문” 마법력의 원천

왜 합리성이 없는 “조동문 프레임”이 먹히는 것일까? 참여정부가 담론 경쟁에서 패한 까닭은 무엇인가? 생각컨대, 첫째는 수구세력의 기득권이 그만큼 강하고 악하기 때문이다. 프레임 경쟁은 “쪽수”를 따지는 패싸움이나 세몰이에 가깝다. 경기규칙은 약육강식이다. 노무현과 문재인 모두 대통령이 되었지만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기득권에 힘으로 맞서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현재 문재인은 “최순실정권”의 기저효과와 촛불혁명의 뒷배로 버티고 있다.

둘째는 수구세력이 능력이 탁월하고 영악하기 때문이다(조기숙 2007: 81-82). 기득권을 가진 만큼 인재들의 질이 높기 때문이다. 수구정당과 조동문 기자들의 능력이 진보정당과 한경오보다 높다고 할 수 있다. 이명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이들의 조직력과 추진력은 정점을 찍었다. 사실 어설픈 프레임은 흥행하기 어렵다. 아주 그럴듯하게, 덜 혐오스럽게, 덜 유치하게 사실을 비틀고 색칠해야 한다. 인터넷 댓글 조작도 그렇지만 “기술자”들이 똑똑하고, 정교하고, 음흉해야 한다.

세째, 노무현과 문재인은 권력을 남용해서 수구세력을 제압하지 못하는 양심과 도덕성을 가지고 있다. “선동정치를 하는 언론과 경쟁을 하려면 일정 부분 같은 전술로 맞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대통령은 어떤 전술을 사용하는 것 자체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지니고 있다. 국민을 속이거나 감추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치를 너무 이성적으로만 접근하려 한다”(116쪽). 이 사실을 수구세력이 잘 알고 역으로 공격한다. 시민단체와 진보언론에게는 참여정부를 편드는 소리를 하지 못하게 약(“어용 프레임”)을 친다. 참여정부에서 조그마한 실수나 오해라도 있으면 당장 큰 일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과장하고 왜곡한다. 노무현과 문재인이 “제왕적 대통령”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교활하게 그 프레임을 덮어씌운다(정말 빨갱이나 제왕이라고 생각했으면 구석에 머리처박고 찍소리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권위주의 시절에 참혹하게 당한 피해의식과 낭만에 가까운 도덕 결벽증을 들쑤셔 진보세력을 몰아붙인다.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 나무라는 것은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조기숙의 <왕따의 정치학>

노무현과 문재인은 집단으로 구박을 받고 따돌림를 당하고 무참하게 짓밟혔다. 즉, “왕따”나 “조리돌림”를 당했다. “노무현 왕따”와 “마법의 유리벽”은 동전의 양면이다. “노무현 왕따”가 구조를 설명한다면 마법을 만들어 내는 “조동문 프레임”은 과정을 말한다. 조기숙(2017)은 왕따 현상을 뒷받침하는 사회 구조를 피해자, 가해자, 동조자, 강화자, 방관자, 방어자로 설명하였다(92-95쪽).

“노무현 왕따는 그의 대통령 임기가 시작되면서 본격화되었다. 국민들은 비만 와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만 해도 노무현 때문이라고 했다. 노무현 때리기는 이른바 국민 스포츠가 되었다”(조기숙 2017: 43).

피해자(김대중, 노무현, 문재인)는 가해자가 싫어하는 어떤 특성 때문에 왕따를 당한다. 민주화 운동, 국민통합, 적폐청산 등이 그것이다. 가해자(수구정당, 수구언론)는 힘, 권력, 기득권을 가진 자인데 피해자를 못마땅해하고 못살게 군다. 가해자는 동조자(수구지지자)들이 자신의 왕따질을 응원해주고 방관자(깨어있지 않은 일반 대중)들이 묵인하는 것을 원한다. 반면에 방어자(깨어있는 시민)가 끼어들어 왕따를 방해하는 것을 싫어한다.

방관자는 “조동문” 주술에 걸려 걸핏하면 노무현 때문이라고 투덜대거나 달동네에 살면서 종부세 걱정에 한숨쉬는 사람들이다. 동조자와는 달리 나서서 가해자를 지지하거나 직접 피해자를 걷어차지는 않는다. 강화자는 한 때 왕따 피해자였던 사람인데 더 약한 왕따 후보가 나타나면 또다시 왕따당할까봐 두려워서, 자기가 당했던 설움을 화풀이하려고 더 심하게 피해자를 해코지 한다(94쪽). 말하자면 가해자의 앞잡이가 되어 왕따를 강화한다. 방어자는 왕따당하는 피해자를 보호하고 부당함을 말하는 사람이다. “모두가 방관할 때 단 한 사람이라도 ‘노’라고 말하면 왕따 현상에는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한다”(94쪽).

“일관되게 호남 왕따의 방어자가 되어 기득권으로부터 온갖 미움을 샀던,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생명까지 버려야 했던 노 대통령에게 호남을 차별했다는 마타도어를 퍼뜨린 사람들은 누구일까. 당연히 이들은 친노와 호남의 분열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다. 왕따 이론에 따르면 가해자, 강화자, 동조자가 바로 그들이다”(309쪽).

참여정부로 따지자면 피해자는 노무현인데, 친노/반노 갈등, 참여정부 실패, 호남홀대 등의 프레임으로 공격을 받았다. 가해자는 수구냉전 정당과 언론이고, 동조자는 그 지지자들과 수구냉전 단체다. 강화자는 대통령 탄핵소추에 나섰던 새천년민주당(이후 민주당),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 참여정부를 헐뜯었던 시민단체와 진보언론(한경오)이다. 이때 방어자는 깨어있는 시민 소수와 문재인(정부 인사)이었다.

왕따질의 법칙

생각을 덧붙이자면 피해자, 가해자, 동조자는 왕따 내내 바뀌기 어렵다. 강화자, 방관자, 방어자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방관자가 늘면 방어자는 줄고, 방어자가 늘면 방관자는 줄게 되어 있다. 강화자는 가해자의 왕따가 무서워서 혹은 더 약한 자를 괴롭혀 보상받으려는 사람이기 때문에 왕따 분위기가 바뀌면 달라진다. 단지 심지가 굳지 못하고 겁이 많아 매질을 못견뎌할(매질이 시작되기도 전에 지레 겁먹고 입에 거품물고 쓰러지는) 뿐이다. 김대중을 빨갱이라고 확인사살한 사람들이 변절한 운동권 인사였던 것처럼 문재인을 괴롭혔던 사람들은 국민의당과 변절한 동교동계 인사들이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어리석게도 “내부총질”을 하면서 노무현 후보를 끌어내렸던 새천년민주당(후보단일화협의회)도 마찬가지다.

결국 얼마나 가해자와 동조자가 왕따 분위기를 휘어잡을 수 있느냐, 얼마나 방어자를 억누를 수 있느냐에 조리돌림의 성패가 달려있다. 즉, 얼마나 방관자를 확대하고 줄이느냐의 싸움이다. 한편에서는 수구 기득권 세력의 힘과 역량, 다른 한편에서는 피해자와 방어자의 인내와 전략이 맞부딪힌다. “마법의 유리벽”은 가해자와 동조자와 강화자의 힘이 월등하여 감히 방어자가 나타나기 힘든 상황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다수가 방관자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왕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피해자와 방어자가 연대하는 것이 중요한데, 가해자와 동조자들은 누군가가 방어자가 되려는 낌새라도 보이면 필사적으로 싹을 잘라버린다. 두목을 배신한 조직원을 보는 데서 난도질을 해대는 조폭의 생리와 마찬가지다. 꼼짝말고 방관자로 남아있으라는 강력한 경고다. 그래서 김대중과 호남을 지키려던 방어자 노무현이 그렇게 두들겨 맞은 것이다(조기숙 2017: 95, 97).

마법과 왕따에서 벗어나기

그러면 어떻게 “마법의 유리벽”을 깨고 주술을 풀 수 있을까? 어떻게 왕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조기숙(2017)은 왕따의 피해자가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고, 수많은 방어자를 만들어내고, 정치세력화로 다수파가 되면 왕따는 자연스레 해소된다고 주장했다(318쪽).

“... 딱 하나 남은 방법은 자신들이 받은 고통을 국민에게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 많은 방어자가 세력화되어 국민 중 친노가 절반을 넘어가면,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선진국 대열로 들어설 것이고 친노 왕따는 사라질 것이다”(211쪽).“왕따를 당하지 않으려면 세력을 키워 자신이 속한 계파를 다수파로 만들면 된다. 다수파가 되어 소수자를 포용하는 게 왕따 정치를 청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212 쪽).

피해자가 방어자를 모아 세력화에 성공한다면 당연히 왕따는 불가능해진다. 다수파가 힘을 잃은 소수파에게 왕따를 당할 까닭이 없다. 하지만 소수파가 스스로 세력을 불려 다수파가 되는 것은 매우 힘들다. 현실성이 거의 없는 전략이다. 가해자가 그렇게 되도록 가만 놔두지 않는다. 동조자와 강화자가 등을 돌리게 되면 곧바로 가해자의 기세가 꺾이게 됨을 잘 알기 때문이다. 또 그런 탁월한 소수파였다면 애초부터 왕따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참여정부 시절 노 대통령은 답답함을 토로하면서도 글쓰기와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국정홍보처도 운영했지만 “조동문의 마법”을 걷어내지 못하였다. 진보언론까지 주술에 걸려 노무현에게 돌팔매질을 해댔다. 친정인 민주당(조순형, 추미애)은 노무현의 등에 칼을 꽂았고, 열린우리당은 청와대를 힐난하면서 각자 살아남을 궁리에 바빴다. 조기숙(2017)은 “만일 진보진영에서 최대 다수의 국민적 지지를 얻고 있는 친노가 패권으로 민주당을 장악했다면...” 라면서 아쉬워했지만(102쪽) 그들은 자질과 역량에서 수구세력에게 밀렸다. 배가 기울면 쥐들이 먼저 알고 떠나는 것을... 義가 아닌 利를 보고 모인 “탄돌이”아니었던가. 아무리 모래알을 모아놓은들 차돌이 되겠는가.

조기숙(2017)은 “조동문 프레임”에 말려들어 참여정부가 스스로 실패했다고 사과하고 “친노”를 해체한 민주당의 전략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했다(205, 258쪽). 맞는 지적이다. “친노” 자체가 판짜기인 것을... 하지만 진보세력이 강대강으로 수구세력과 “맞짱”을 떴다면 결과는 참혹했을 것이다. 어차피 마법이든 왕따질이든 힘자랑인데, 어떻게 약자가 강자를 힘으로 이긴단 말인가? 아마도 깡마른 독기를 품고 어설프게 주먹을 휘두르다보면 왕따질을 피하기는 커녕 더 가혹한 폭력을 각오해야 한다.

행여 노무현이 박정희와 전두환처럼 총칼로 수구세력을 제압했다 해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義로 뭉쳤던 방어자(민주세력)는 흩어지고, 냉소를 짓는 방관자는 늘어났을 것이다. 대의를 잃고 명분을 잃고 사람을 잃고 모든 것을 잃었을 것이다. 만일 문재인이 참여정부 시절 사사건건 싸움닭처럼 악다구니를 썼더라면 지금의 문 대통령은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그들은 빙하기같은 겨울이 다가옴을 깨닫고 미련없이 고개를 떨군 마지막 잎새였다. 순리대로 조용히 몸을 땅에 삭히며 새싹이 솟는 봄을 참고 견디면서 기다렸다.

소정의 비폭력이 답이다

누구나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화된 힘”을 원하지만 아무 때나 그 힘을 얻을 수는 없다. 정치세력화는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며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어떻게 하면 진보세력이 “조동문”의 마법을 풀고 왕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소정 선생님의 비폭력을 음미해보자. “마법의 유리벽”이든 “왕따질”이든 모두 강자가 약자에게 휘두르는 폭력이다. 소정의 비폭력은 강자에게 매를 맞더라도 약자는 흥분하거나 말려들지 말고 비폭력으로 대응하라는 것이다(1986: 289; 2008: 68-69). 폭력을 극복하는 대안이 폭력일 수는 없으며, 따라서 비폭력은 때리지 말고 말로 하는 것이다(1986: 290).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안하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비폭력투쟁—악한 강자에 대하여 정의에 입각한 말함과 저항(2001: 88)—을 하라는 것이다(1986: 294). 강자에게 매를 맞기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매를 맞더라도 할 말은 계속 하라는 것이다(1991:118; 2001:246). 이때 말은 합리성이 있고 사실과 이치에 맞아서 강자의 이성조차 감히 부정하거나 거절하지 못하는 지극히 옳은 말이다(2008: 66). 비폭력은 철저하게 비폭력이어야 하며 말의 형식을 빌린 폭력 행사가 아니다(1991: 322; 2001: 149). 군더더기 없이 꼭 필요한 실존적 발언이나 최소한의 말이어야 한다(1996: 56; 2008: 491). 예컨대, 박해를 받더라도 “세금폭탄”은 사실이 아니며 호남 왕따는 잘못이라고 소신껏 말하는 것이 비폭력이다. 하지만, 이성을 잃고 사실무근이나 흑색선전이라며 펄쩍 뛰면서 막말을 쏟아내는 것은 난동이다. 조기숙(2007)은 “옳은 말을 왜 그렇게 싸가지 없이 하냐고요? 옳은 말을 옳게 하면 누가 써준대요?”(135쪽)라고 진보언론에게 항의하고 싶었겠지만 흥분하지 말고 옳은 말을 옳게 하는 것이 비폭력이다.

폭력에 의지하는 강자는 정당성이 빈약하며, 철저하게 잇속으로 엮여진 세력이다. 한국에서 수구세력은 보수도 우익도 아닌 그냥 그때그때 형편에 맞추어 부와 권세를 쫓는 기회주의자들이다. 이념집단이 아니라 사익을 위해 애국을 팔고 안보를 파는 구악舊惡일 뿐이다(민주당이 진보와 보수 역할을 다 하느라 바쁘고 헷갈려한다). 이들은 금덩이가 커질수록 탐욕도 커져 법도 규칙도 없이, 위아래도 없이 서로 칼부림을 하다가 스스로 붕괴한다(1986: 297-298). 조기숙(2007: 49)의 예측과는 달리 구악들은 장기집권은 커녕 끝간데 모르고 해먹다가 9년 만에 자멸했다. 따지고 보면 이명박이나 최순실이 적당히 해먹고 주위 사람들에게 너무 박하게 굴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패가망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강자의 폭력에 대하여 약자가 비폭력으로 대응하면 일단 강자의 폭력으로부터 약자가 보호되고, 성장할 토대가 마련된다(1991: 18-19). 소정은 “이 모든 절제가 무기력이 아니라 기다리는 힘이며 성장하는 힘이며 폭력보다 강한 힘”이라고 했다(1991: 19). 그런데 약자들이 분을 참지 못하고 폭력으로 대항하거나 난동을 부리면 스스로 분열하던 구악들이 단결하여 폭력 정당성을 축적하게 된다(1986: 297). 망해가던 구악들이 살아나 보복으로 보답할 것이다. 그래서 약자는 인내하고 오랜 세월을 끈질기게 참아야 한다(2001: 204). 소정은 “참는다는 것은 포악함에 시달리는 사람이 갖출 덕목의 모두이며 비폭력과 동의어”라고 말했다(1986: 336). 절망같은 폭력(왕따)를 참고 견디면서 비폭력으로 의미있는 고난을 겪은 자만이 평화를 만든다(1980: 350, 365).

노무현의 비폭력과 자기희생

노무현은 김대중과 호남이 왕따당하는 것에 맞서면서 매를 맞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본인이 옳다고 생각한 말을 멈추지 않았다. 청문회에서 전두환에게 명패를 던지기도 했지만 대체로 폭력이 아닌 말로 다투었다. “마법의 유리벽”에 갖혀 있었지만 그는 치열하게 사고하고 글쓰고 논리적으로 말하고 대화했다. 답답하고 억울하고 화가 났겠지만 노무현은 “조동문 프레임”에 맞서기 위해 권모술수를 부리지지 않았다. 반칙과 특권을 거부하고 원칙과 상식에 충실한 바보였다. 조기숙(2007: 123)은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는 신념 하나로 노대통령은 제 갈 길을 가고 있다”라고 했다.

노무현은 이명박근혜처럼 헌법과 법률을 무시한 채 정적을 사찰하거나 협박하고 여론을 조작하지 않았다. 국정원이든 기무사든 검찰이든 경찰이든 국가기관을 일절 동원하지 않았다. 권력은 쥐고 있었지만 수구세력의 폭력에 맞서 폭력으로 대항하지 않았다. 이명박 정권이 국가기록물(하드디스크 복사본)을 유출했다며 몰아붙였을 때에도 편지를 적어 할 말을 하고 깨끗이 물러섰다. 그는 끝까지 비폭력(이성, 상식, 논리)에 의지하여 참고 견디었다. 오랜 시간 의미있는 고난을 겪어온 또다른 인동초였다. 그 많은 사람들이 봉하마을에 모여들어 다같이 슬퍼하고 자책하면서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를 외친 까닭이다.

노무현의 서거는 본인의 최선이었다. 그의 마지막 글에서 읽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한다고 했다. 말하지 못하는 고통이 전해져 왔다. 비폭력자로서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그는 운명이라고 적었다. 본인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그의 서거는 마지막 비폭력(의사표시)이자 “자기희생”이었다. 그의 몸던짐이 사람들을 울렸고 움직였다. 마법에서 깨어나 진실을 알게 했다. “마법의 유리벽”은 금이 가기 시작했고 주술은 힘을 잃기 시작했다. 왕따질을 방관했던 사람들의 눈을 뜨게 했고, 패거리질을 하던 동조자와 강화자를 부끄럽게 했다. 저수지둑이 터진 듯이 방관자들이 방어자가 되어 쏟아졌다. “비폭력의 효과는 원수를 갚는 정도가 아니라 천하가 그에게 돌아오게 할 정도로 큰 효과가 있다”(1996: 423). 그 가슴 울림이 9년 동안 성장하여 광장의 천만 촛불이 되었다. “조동문”의 주술은 타버리고 “마법의 유리벽”은 깨져나갔다. 왕따 방어자이자 피해자였던 노무현이 정치의 전범典範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희생자가 지켰던 규칙이 악한 세상을 구출하는 원칙으로 만인에게 인식”되었다(1996: 437-438).

노무현과 문재인의 귀환

사실 이명박근혜가 없었다면 노무현과 문재인의 귀환은 최소한 20년은 더 걸렸을 것이다. 이명박의 탐욕과 “최순실 정권”의 엽기 행각은 21세기 민주화 역사의 정점을 찍었다. 이제 많은 시민들이 노무현의 눈을 맞추고 그 말을 알아듣게 되었다. 수구세력은 여전히 “대북 퍼주기”와 “세금폭탄”과 같은 주술을 재탕·삼탕하고 있다. 수구 정권에서 국가기관을 동원하여 인터넷 댓글을 조작했다는 사건을 조사하고 있지만 아직도 온라인은 세력싸움으로 뜨겁다. 적폐들의 저항과 패악질도 거세다. 하지만 이제는 “조동문”의 마법도 왕따질도 큰 효과를 보기 어렵다. 문재인 정부는 이제 그만 피해의식과 도덕/양심 결벽에서 벗어났으면 한다. 인재를 발굴해 자질과 역량을 키워야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멀리 보면서 보편성과 합리성과 원칙과 상식에 비추어 묵은 난제를 하나하나 풀어갔으면 한다.

참고문헌

인용하기: 박헌명. 2018. <마법에 걸린 나라>의 <왕따의 정치학>. <최소주의행정학> 3(9): 1-4.

2019. 02. 12 마지막 고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