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n Young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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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과 미쓰비시 전범유산 PDF


월간
 
최소주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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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우연한 기회에 일본 니이가타新潟현 사도佐渡시를 방문하였다. 니이가타항에서 북쪽으로 70km를 달려 료츠兩津항에 도착했다. 해무 속에 드러난 사도섬은 조용하고 평화롭게만 보였다. 한반도를 위아래로 누른 듯한 모양이고 제주도의 절반이 못되는 크기다.

인간의 탐욕과 따오기의 죽음

사도는 희귀새 따오기("토키")의 도래지로 유명하다. 섬 어디를 가도 따오기를 주제로 한 물건과 형상을 볼 수 있다. 동경에서 니이가타로 가는 신칸센 열차의 이름도 토키다. 때마침 눈썰미 좋은 버스운전기사의 배려로 논가에서 먹이를 구하는 따오기 내외를 볼 수 있었다. 일본에서 태어난 마지막 따오기가 2003년 죽은 후 중국에서 기증받아 인공으로 부화시킨 것이다. 인간의 탐욕은 산업화로 질주했고 따오기를 멸종위기로 내몰았다. 창녕의 우포늪과 마찬가지로 사도시는 사라진 따오기를 복원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다.

전범기업 미쓰비시와 사도금광의 흑역사

사도는 또한 일본 최대의 금광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폐광이 되었지만 거의 900년 동안 금과 은을 캐냈다. 특히 아이카와相川 금광은 에도 막부(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무너뜨린 도쿠가와 정권)부터 400년(1596-1989)을 이어왔는데, 지금까지 금 80톤과 은 2,500톤을 생산했다고 한다. 100여년 전에는 아이카와에만 5만명(현재 사도섬 전체 인구)이 몰렸다고 한다. 한 가운데만 농지인 섬에 쌀, 물, 집이 부족해졌고 따오기가 밀려났다. 사금을 채취하는 다른 광산과는 달리 아이카와광산에서는 굴을 파고 광석(ore)을 캐냈다. 일일이 사람 손으로 금맥을 파들어가는 채굴방식이다. 여기에서 생산된 금화로 네덜란드 등 서구와 교역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었으니 일본에서 보면 자랑스러운 산업유산이다.

에도 막부(1603-1868)와 메이지 정부(1868-1912)에 이어 1896년 미쓰비시三菱가 아이카와 광산을 넘겨받아 충실하게 일본제국에 부역했다. 일제는 사도광산에서 캐낸 금과 은으로 전쟁을 벌였고,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몰아넣었다. 특히 중일전쟁을 벌이면서 1938년 4월부터 점령지에서 무자비하게 인력과 물자를 총동원하였다. 미쓰비시의 활약이 두드러진 시기다. 사람들을 끌어와서 광산에 집어넣고 채석을 강요했다. 임금을 주기는 커녕 수시로 폭력을 휘두르면서 노동을 착취했다. 최소한의 음식과 옷가지와 잠자리를 제공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오도 가도 못하게 했다. 석탄을 캐낸 군함도에서 벌인 미쓰비시의 만행과 닮은 꼴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제, 그 전쟁에 부역한 전범기업 미쓰비시, 그리고 악랄한 강제동원은 사도금광의 가치와 인간의 존엄성을 갉아먹었다.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무일푼으로 돌아오신 당숙

어릴 적 집안 어른들이 일본으로 돈벌러 간 얘기를 종종 하셨다. 종조부께서는 일본에 가셔서 돈을 벌어오셨다고 했다. 어떤 일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운좋게도 품삵을 제대로 쳐준 관리자를 만난 모양이다. 당숙은 금광에서 일하셨다 했다. 1,500여명의 조선인이 사도금광에서 일했다는 자료도 있고, 1940년 논산에서 100여명을 집단모집으로 강제동원했다는 증언도 있다. 고향이 논산에서 멀지 않았으니 그 무리에 포함되었던 것은 아닐까?

당숙은 거의 매일 몽둥이로 맞으면서 일만 하셨다고 했다. 우직하셨던 당숙이니 꾀를 내서 매를 피할 줄도 모르셨을 터. 가장 힘들고 위험한 채석일을 하고도 당숙은 결국 거의 무일푼으로 돌아오셨다. 사람들은 살아서 돌아온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라고 했다. 종종 당숙은 약주를 하시고 동네 어귀부터 악다구니를 쓰셨다. 작은 체구지만 장사같은 힘을 가졌던 당숙이었다. 하지만 한창 나이에 허무하게 돌아가셨다. 화병이나 진폐증같은 후유증이었을까? 그때 나는 잔치인 줄만 알고 화덕에 걸린 가마솥을 맴돌며 7남매를 건사해야 했던 당숙모의 하얀 치마자락을 끌고 있었다.

에도시대와 무관한 미쓰비시의 전범유산이다

사도금광관광은 주로 (1) 금광코스 체험, (2) 근대금광산업유산 견학, (3) 금광정보센터와 전시자료관 방문이다. 일본은 에도시대에 한정하여 세계유산등록을 신청했다. 한마디로 꼼수다. 거품을 일으켜 금을 농축한 浮遊選鑛場(1935), 시멘트가 보급되기 전에 돌로 세워진 浮選鑛所, 광석저장소(1938), 광석을 깨뜨린 착광장搗鑛場, 부족한 물을 재활용하기 위한 thickener(1940), 금주조공장 등 관광상품 대부분이 에도시대와 무관하다. 모두 사도광산을 불하받은 전범기업 미쓰비시의 작품이다. 심지어 광산의 명물인 도유노와리토道遊の割戶 역시 19세기 말 발파에 의해 꼭대기가 V자로 갈라진 것이다. 에도시대의 유산에 에도시절은 없다. 주조공장은 수영장으로, 부유선광장 아래는 골프장으로 쓰였다가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공장 비탈 위에 있던 소학교를 다녔던 센터장의 설명이다. 반면 조선인들이 사용하던 숙소와 식당 자리는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반성없는 아베정권의 역사 부정과 왜곡이다.

산비탈에 조성된 거대한 부선광소와 부유선광장은 현재 역사 유적으로 각광받고 있다. 낮에는 담쟁이가 삭은 철근 콘크리트를 뒤덮고 있고, 밤에는 화려한 조명발이 과거를 수놓고 있다. 어둠 속에 흘러나오는 음악은 로마의 콜로세움을 보듯 웅장하다. 순간 미쓰비시가 저지른 범죄와 소리없이 죽어간 원혼은 사라진다. 인쇄물, 동영상, 강의 어디에도 관련 사실을 찾아볼 수가 없다. 반짝이는 금과 산업시설만 미화되었다. 따오기와 공생을 말하지만 근대화 시절의 과오에는 입을 닫는 식이다. 아직까지 소유권을 가진 미쓰비시는 침묵하는 가운데 정부가 전범행적를 분칠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겠다고 설치고 있다. 어떤 미사여구를 늘어놓는다 한들 경우가 아니다. 그저 미쓰비시 전범유산일 뿐이다.

사도섬은 조선인이 끌려가서 매맞은 슬픈 섬이다. 춥고 배고파서 서럽고 떠나지 못해 목이 멘 섬이다. 진실이 묻혀가는 원통한 섬이다. 눈감지 못하고 죽은 조선 따오기들이 떠도는 섬이다. Sojeong

같이 읽기

인용: 박헌명. 2024. 유네스코 세계유산과 미쓰비시 전범유산. <최소주의행정학> 9(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