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n Young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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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자의 완장질과 Procrustes의 침대 PDF


월간
 
최소주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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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딸아이의 여권을 신청하러 구청에 갔다가 어이없는 일을 경험했다. 사진과 여권 신청서를 담당직원에게 건네주고 기다렸다. 직원이 신청서를 살펴보더니 영문 이름에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외교부에서 공문이 왔다면서 영문 이름에 빈칸을 넣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띄어쓰기는 안된다는 것이다.

영문 이름을 붙여 써야 한다?

순간 황당하다가 화가 치밀어 오른다. 직원이 한 말이 믿기지 않는다. 어찌하여 정부가 영문 이름을 쓰는 것까지 간섭을 한단 말인가? 백성이 “누려야 할 최소한”을 빼앗긴 노여움이 고인다. 정말 그런 지시가 있었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름을 붙여 쓰라 말라 한단 말인가, 이름자를 붙여도 발음하는데 문제가 없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어쩌란 말인가,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지시를 내릴 수 있단 말인가 등을 토해냈다. 외국에 방문할 기회가 많은 외교부 직원들이 나라마다 이름을 쓰는 관습이 다른 것을 잘 알텐데 어찌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혼자말로 구시렁거리는 탄식이자 독백이었지만, 사실상 담당 직원에 대한 항의이자 외교부에 대한 시위에 가까왔다.

의외의 반응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직원은 다시 한번 외교부의 지시니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한다. 그럼 나같이 영문 이름을 띄어 쓴 사람은 어찌하느냐고 물으니, 이미 여권을 만든 사람은 현재 쓰고 있는 영문 이름 그대로를 사용하면 된댄다. 새로 여권을 신청한 사람들만 붙여쓰게 한댄다. 컴퓨터 시스템 문제가 아니란 소리다. 당신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니 더이상 시비를 걸지 말라는 뜻으로 들린다. 그래도 내가 항의를 계속하자 직원은 법률용어를 들먹이며 이의신청을 하겠느냐고 묻는다.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 기꺼이 하겠노라고 말한다. 내용을 확인하고 절차를 알려달라고 말한다. 내가 적극적으로 반응하자 담당직원은 조금은 당황한 표정이다. 직원이 그리 얘기하면 대개는 툴툴거리면서도 알았다면서 대충 넘어갔으리라... 직원은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것처럼 여기 저기를 왔다갔다 하면서 무언가를 찾는다. 몇 분이 지나도 문서를 찾지 못했는지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아무렇치도 않은 듯 내게 한마디를 한다.

“정 그러시면 오늘은 (특별히) 영문이름에 빈 칸을 넣게 해주겠습니다.”

나는 이 말에 충격을 받는다. 외교부의 공문 얘기도 납득이 가지 않는데, 담당 직원의 말은 차라리 참담하기까지 하다. 딸아이의 영문 이름을 붙이지 않고 신청서를 접수시키기는 했으나 집으로 돌아오면서 노여움을 삭이지 못했다. 이게 멀쩡한 공무원의 입에서 나온 소리란 말인가...

공무원의 완장질이다

외교부가 영문 이름을 띄어 쓰는 것을 금지했다면, 공무원은 일단 그 지시대로 시행하고 시민의 불만을 전달하여 잘못된 결정을 수정하는 것이 정상이다. 영문 이름에 빈 칸을 넣어도 괜찮은 것이라면 애초부터 외교부의 공문을 들먹일 필요가 없다. 그냥 로마자 표기법처럼 권고사항을 알려주면 그만이다. 그럼에도 자기가 마치 특혜를 주는 것처럼 띄어쓰게 해주겠다고 말하는 것은 완장질이다. 노무현씨가 사과하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취소하고, 사과하지 않으면 발의하겠다는 조순형씨의 한심한 말법과 마찬가지다. 소추안을 발의할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라면 사과를 하든 말든 발의해야 한다. 국회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사과하면 되는 사소한 사안이라면 탄핵소추안을 발의하지 말았어야 했다. 말하자면 대통령의 “사과”나 “탄핵”이 아니라 그냥 노무현이 싫은 것이다. 결국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개인의 잇속을 챙긴 셈이다.

만일 영문 이름을 붙이는 것이 의무사항이 아닌 권장사항이라면 그 취지를 설명하고 시민들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언제 띄어 써야 영어발음에 맞는지 알려줘야 한다. 그런데 자신이 외교부의 지시를 무시할 권능이 있는 것처럼, 그래서 특별히 혜택을 베푸는 것저럼 말하는 것은 권한 남용이다. 이른바 “완장찬” 자들의 기고만장이다. 시민 위에서 군림하면서 자신의 지시대로 시민들을 이리저리 줄세우고 훈계하는 맛에 취한 자들의 전형이다. 법과 절차를 핑계대지만, 사실은 법과 절차를 제멋대로 적용하여 이득(권력욕)을 취하려 할 뿐이다. 침묵하는 다수에게 엄하고 귀찮게 따지는 사람들에게 약하게 굴어 소위 “떼법”을 자초한다. 떼법은 백성의 난동이 아니라 정부의 편파와 부당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런 “완장질”은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고 공복인 공직자가 섬겨야 하는 왕(주권자)임을 망각한 정신줄이다.

영문 이름을 붙여 써도 된다

여권법 시행규칙 제 2조의 2는 “여권 명의인의 로마자로 표기한 성명...은 가족관계등록부에 등록된 한글성명을 음절 단위로 음역(音譯)에 맞게 표기한다”로 되어 있다. 글자 하나 하나를 소리나는 대로 로마자로 표기한다는 뜻이다. 담당 직원이 말한 내용은 외교부의 여권업무 웹집(http://www.passport.go.kr/)이 아닌 주일본 대사관 웹집에서 찾았다. 여권상 영문성명 표기방법으로 “(1) 여권상 영문성명은 한글 성명을 로마자(영어 알파벳)로 음역 표기함,” “(2) 한글성명의 로마자 표기는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에 따라 적는 것을 원칙으로 함,” “(3) 영문 이름은 붙여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음절사이에 붙임표(-)를 쓰는 것을 허용함,” “(4) 종전 여권의 띄어 쓴 영문 이름은 계속 쓰는 것을 허용함”이라고 적고 있다.

이 영문성명 표기법이 어떠한 법적 근거가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시행령이나 규칙 수준도 아닌 부서 책임자의 “지시”인 것으로 보인다. 문구를 따져봐도 이름을 한 자씩 띄어 쓴다 해도 신청접수를 거부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한글의 원리대로 얼마나 정확하게 소리를 표시하느냐가 중요하다. 영문 이름을 붙여쓸 경우 영어발음이 한글이름과 다르면 띄어쓰면 그만이다. 구청 담당직원은 외교부 지시를 빙자하여 영문 이름을 꼭 붙여써야 한다는 식으로 시민을 호도한 것이다. 본래 취지를 살려 백성 편에서 해석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가감하여 백성의 기본권(이름을 결정하는 자유)을 제한한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직원의 말에 따라 영문 이름을 붙여서 여권을 만든 다음 뒤늦게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고 항의를 한다면, 그 직원은 틀림없이 자신은 이름을 붙이라고 강요한 적은 없다며 오리발을 내밀 것이다.

그런데 일선 공무원의 완장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정부가 무슨 권능으로 이름 쓰는 것을 “허용”을 하고 말고 한단 말인가. 이런 표현이 과연 민주공화국에서 가당하기나 한가? 왜 백성들이 이름쓰는 것을 정부에 허락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김수한무거북이와두루미...” 류가 아니라면 갑돌이든 갑순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옷입는 것도, 밥먹는 것도, 자는 것도, 숨쉬는 것도 정부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가? 인간이면 누구나 갖는 인권에 관한 문제를 감히 정부에서 이래라 저래라 간섭한다는 것인가? 실제 내용과는 별개로 그 발상이 식민지를 경영하는 총독의 정신줄이다. 식민지 백성은 나라의 주인이 아니라 짐승처럼 노예처럼 찍어눌러 다뤄야 하는 그런 존재일 뿐이다.

영문 이름 철자만 제대로 쓰면 된다

도대체 영문 이름을 붙여 써서 이 나라 백성이 얻을 수 있는 실익은 무엇인가? 이름 두 자를 영문으로 띄어 쓰면 미국의 어느 기관은 두 자 모두를 첫째 이름(first name)으로 제대로 불러주기도 하지만, 대개는 그들의 관습대로 가운데 이름(middle name)과 첫째 이름으로 나누어 받아들인다. 이런 의미에서 외교부의 권고는 이해할 만한 구석도 있다. 하지만 가운데 이름으로 인식한다 해도 약간의 혼동이 있을 뿐 실제 본인임을 확인을 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금융거래도 마찬가지다. 사회보장번호와 여권번호가 인식정보이며, 성명과 생년월일은 참고사항이다. 비행기표에는 영문 이름에 빈 칸이 있든 말든, 붙임표(-)가 있든 말든 무조건 붙여서 나온다. 영문 이름의 철자가 틀리지 않는 한 아무런 문제가 없다.

결국 영문 이름을 붙여쓴다 해도 백성이 얻을 수 있는 실익은 없다. 단지 가운데 이름으로 오인할 가능성과 혼동을 줄일 수 있다는 미국의 실익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왜 대한민국 외교부는 백성의 실익이 아닌 미국의 실익에 집착을 하는 것일까? 미국에서 영문 이름을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으면 그만인가? 미국에서만 괜찮으면 중국에서든 독일에서든 브라질에서든 어찌되어도 상관없다는 것인가? 대한민국 여권의 목적이 미국에 방문하는 것인가? 각 나라마다 이름을 쓰는 방식이 다르고 관습이 다른데, 대한민국 백성이 미국식에 맞춰야 하는 소이연은 무엇인가? 명색이 대한민국 외교부가 나서서 자국 백성의 기본권을 제한하면서까지 미국식을 권고하고, 완장질을 통해 사실상 강요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모든 나라가 미국식 이름 법과 관습을 따른다면 외교부의 권고는 나름대로 합리성과 실익을 가질 만하다. 하지만 미국식은 모든 나라에서 인정하는 세계 표준이 아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성이 한 자 이름이 두 자가 대부분이지만, 성이 두 자인 사람도 있고 이름이 외자거나 석 자인 사람도 있다. 외국에서 성이 두 단어로 되어 있는 경우나 이름이 세 단어 이상인 경우도 적잖이 있다. 어느 나라에서는 아예 성명이 단어 하나로 되어 있다. 성과 이름을 구분하지 않아 성이 이름이고 이름이 성이다. 더 황당하게는 성명이 몇 단어로 되어 있는데, 역시 성과 이름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에게 첫째 이름, 가운데 이름, 마지막 이름(last name)을 물어본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죄다 엉터리 이름이라며 힐난하며 근본없는 상놈이라며 돌팔매라도 던지려는가? 나와 다른 남을 용인하지 않는 독선이다. 약자에게는 한없이 야박하게 굴고, 센놈에게는 간 쓸개를 다 내어주고 비굴하게 목숨줄을 구걸하는 사대주의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완장질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는 행인을 데려와 자신의 침대에 눕히고 침대보다 크면 망치로 행인을 자르고, 작으면 행인을 늘려뜨리는 패악질을 저질렀다. 그는 테세우스(Theseus)에게 잡혀서 똑같은 방법으로 그의 침대에 맞춰져서 죽었다. 어쩌면 내가 경험한 공직자들이 바로 프로크루스테스일는지 모른다. 영문 이름에 관한 지침을 결정한 자도, 완장질로 시민을 호도한 일선 공무원도 그 정신줄은 매한가지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세상의 전부이고 그것이 진리라고 믿지만, 자의적인 잣대를 백성들에게 들이대고 길네 짧네 하면서 훈계질만 할 뿐이다.

이런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는 주위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수년 전부터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한국학술진흥재단에 신고해야 한다. 학생들이 외국에서 공부하는데 도움을 준 것도 없으면서 힘들게 박사학위과정을 마친 것을 신고하라 강요하는 것이 우스꽝스럽다. 손도 안대고 코푸는 격이다. 또 신고를 안하면 벌금을 물고 국내 대학에 취업하지 못하도록 해놓았다(지원서류로 신고필증을 제출하도록 함). 그런데 마이크로소프트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제대로 신고를 할 수가 없다. 오직 마이크로소프트 고객만 외국학위를 취득할 수 있다는 소린가? 또한 지도교수의 성함을 제대로 입력할 수가 없다. 지도교수가 모두 한국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성함에 들어있는 모든 빈칸을 삭제하여 붙여주는 “친절함”을 보여준다. 대학 이름이든 전공이든 수백 개는 됨직한 펼쳐내림 메뉴에서 골라야 한다. 거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대학이나 전공은 기본적으로 입력할 수가 없다. 세계수준의 정보기술기관에서 수년 간 일한 사람이 하루종일 용을 써도 어찌할 방법이 없는 외국박사학위 신고 시스템이라니...

시스템 분석과 설계 관점에서 보면 다양성을 용납하지 않는 독재자의 폭력이다. 어찌하여 마이크로소프트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서비스를 제한하고, 외국박사학위를 관리한다면서 외국인 지도교수 성함을 제대로 쓰지 못하도록 하는가? 대학이나 전공 이름도 그냥 적도록 할 일이지 어찌하여 완전하지도 않은 그 긴 목록을 헤매도록 한단 말인가(이런 무모한 시도를 했다는 자체가 놀랍다). 신정아씨는 가짜 학위를 신고하고 교수까지 되었는데, 멀쩡하게 학위를 받은 사람은 신고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정부가 외국학위수여자를 관리한답시고 이런 제도를 만들었으나 가짜 학위를 분별해낼 능력도 없는 딱한 형편이다. 무책임한 관료편의주의이자 “프로쿠루스테스 침대질”이다. 그저 관료들 머리에 든 것을 잣대랍시고 들이대고 있으니 말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제품을 쓰지 않는다고 팔다리를 핏줄이 터지도록 당겨대고, 이름이 두 단어를 넘는다고 머리와 목을 짓누르고, 듣도 보도 못한 대학에서 목록에도 없는 전공을 공부한다고 얼굴을 찍어내고 있다. 그런다고 세상이 모두 공무원을 중심으로 도는 줄 아는가. 이런 엉망인 시스템을 사용하라고 강요하는 것 자체가 폭력이다. 멋드러진 웹집에 수여국별, 학교별, 전공별 학위를 보여줘 봤자, 가짜인지 진짜인지, 맞는지 틀리는지도 모르는데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주인인 백성에게 맞춰야 한다

이 나라의 모든 권력은 백성에게서 나온다. 백성이 주인이라는 말이다. 민주공화국은 백성의 돈으로 운영되며 백성이 원하는 일을 해야 하는 존재이다. 흔히 공복이라고 부르는 공직자는 주인을 섬기는 머슴이지, 주인의 머리꼭대기에 올라앉아 완장질을 하면서 세경이나 챙기는 건달이 아니다. 게으르고 주인을 우습게 보는 머슴의 말로는 멍석말이다. 주인의 자존과 고유함을 내팽개치고 누구든 힘센 자에게 맹종하는 사대주의는 용납될 수 없다. 법과 상식에 기대지 않고 약자에게 혹독하고 강자에게 비굴한 재량 남용도 경계되어야 한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억지로 백성을 맞출 것이 아니라 성심을 다해 공직자 스스로를 백성에게 맞추어야 한다. 다양한 백성이 살고 있듯이 나라마다 서로 다른 문화가 있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소정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최소주의, 비폭력, 민주주의가 아닐까? Sojeong

인용: 박헌명. 2016. 공직자의 완장질과 Procrustes의 침대. <최소주의행정학> 1(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