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브라질 올림픽에서 한국 축구 대표단이 준결승전 진출을 놓고 온두라스 대표단과 경기를 치렀다. 경기 후반에 온두라스 선수가 공을 차넣어 0대 1로 한국 축구단이 패했다. 그런데 골을 넣은 후 온두라스 선수들이 걸핏하면 축구장에 드러눕거나 경기 진행을 방해하여 비난을 받았다. 전력이 한 수 아래로 평가되었던 온두라스에게 이리 허망하게 진 것에 대해 선수와 관중이 분노했다. 이른바 “침대축구”(grassrolling)에 대책없이 당한 것이다. 얼마 전에는 중동 국가와 치른 경기에서도 “침대축구”는 위력을 발휘했다. 온두라스와 중동 국가만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럽에서도, 심지어는 월드컵 경기에서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다만 티가 안나게 시간을 지연시키는 영리한 전략으로서 좀 덜 미운 “침대축구”였을 뿐이다. 하지만 갈수록 “침대축구”는 적나라하고 구역질나는 양상이다. 추잡하기 그지없는 양아치짓이다. 경기 자체가 아니라 오직 이기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올림픽 금메달 정신줄이다. 정말 무조건 이겨야만 맛인가?
축구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다. 2002년 미국 유타주 Salt Lake City에서 열린 겨울올림픽에서 김동성 선수가 안톤 오노 선수의 “헐리웃 액션”으로 금메달을 놓쳤다(축구에서 헐리웃 액션은 골치거리가 된지 오래다). 2014년 러시아 Sochi에서 열린 겨울올림픽에서 김연아 선수가 심판진의 엉터리 판정으로 은메달을 받았다. 우리나라 선수만 피해를 당한 것은 아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우리나라가 금메달 12개로 단번에 4위에 올라섰지만, 군부독재정권의 무리수와 치부만 드러낸 성적이었다. 특히 남자 복싱 라이트 미들급에 나서서 Roy Jones Jr. 선수를 꺽고 금메달을 차지한 박시헌 선수는 그 참혹한 부끄러움의 정점에 있다. 한국인이 봐도 황당하기 그지없는 3-2 판정승 아니었던가. 전두환 정권이 했던 것처럼 푸틴 정권도 체제유지를 위해 주최국의 이점을 악용하여 김연아 선수에게 횡포를 부린 것이다. 다 오십보 백보다.
탁구공을 치면서 운동하는 의미를 생각하다
언젠가 가까운 후배의 제안으로 탁구시합을 하게 되었다. 체육학과 선수출신에게 몇 달 동안 “레슨”이라는 특별교육을 받았다면서 설레발이다. 하지만 경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후배의 실력은 과연 “레슨”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후배의 기술은 한마디로 이기는 요령 몇가지일 뿐이었다. 특히 상대방이 치지 못할 만한 곳에 공을 보내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상대방과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공을 맞추지 못하는 것을 보고 쾌감을 느끼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그 후배는 그 요령조차 숙달하지 못했고, 불행하게도 그 얄팍한 꼼수에 넘어가지 않는 상대를 골랐다. 경기랄 것도 없는 “탁구공 치기”가 끝난 다음에 나는 왜 기본기부터 다지지 않았는지를 물었다. 상대방을 골탕먹이는 것 말고 상대방과 탁구를 즐기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았는지 물었다. 상대방이 받아 치기 좋게 공을 보내면 기본기도 단련이 되고 서로 주고 받기가 길게 이어지면서 즐거움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상대방이 치기 좋은 곳에 공을 맘대로 보낼 수 있다면 언제든 치기 어려운 곳에 원하는 대로 보낼 수 있는 법이라고 했다. 그 후배는 그런 사람됨과 운동의 기본을 교육받지 못하고, 그저 이기는 기법만 전수받은 셈이다. 이른바 “레슨”이라는 엉터리 프로페셔널리즘이다.
그러면서 나는 운동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왜 운동을 하는지를 자문한다. 운동이라는 것은 묘하다. 하루하루 자신을 단련하여 기량이 늘어가는 즐거움이 있다. 자신의 손과 발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그런 희열이 있다. 우아한 발차기가 제대로 들어가고, 찬 공이 자로 잰 듯이 날아가 꽂히고, 곡예하듯 던진 공이 그물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그런 감흥이다. 또한 다른 사람의 재주를 보고 마치 자신이 한 것처럼 흥분하게 된다. 이심전심으로 감정이입이 된다. 텔레비젼에서 중계되는 격투기나 축구나 농구를 보는 재미가 바로 이런 것이다. 내가 응원하는 선수든 아니든 상관이 없다. 하물며 서로의 기량을 겨루는 경기에 직접 나서서 생생한 긴장과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일임에랴... 땀을 흠뻑 흘린 후에 상대방과 동지의식을 느끼거나 더 친밀한 감정을 갖는 것은 자연스럽다. 진정으로 운동을 즐기는 사람들 얘기다. 어쩌면 선조들도 활쏘기를 하면서 이런 느낌을 나누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활쏘기는 자기 자신과 겨룬다는 점에서 선수들이 몸으로 부대끼는 격투기나 축구와는 다르다.
이런 생각을 해서인지 어느 경기에서든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없거나 기량이 아닌 꼼수로 일관하는 선수들을 나는 남달리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우리 선수들이 “침대축구”를 한대도 마찬가지다. 또한 판정이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기운 심판진과 욕설을 쏟아내고, 술병을 던지고, 경기장에 난입하는 난동꾼도 곱게 보아주지 못한다. 모두 경기를 망친다는 면에서 차이가 없다. 승리감을 누릴 권리가 없는 자들이고 아예 경기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자들이다. 경기를 즐길 만한 깜냥이 안되는 뒷골목 잡배들이다.
축구 경기의 주인인 관중이다
“침대축구”를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한다. 과연 누구를 위한 축구일까? 과연 잔디밭에 드러눕는 선수들이 문제일까? 심판이 잘못한 것일까? 아니면 객석에서 축구를 구경하는 관중들 탓일까? 그러면서 나는 답답하기만 한 정치 상황을 연상하게 된다.
축구경기에 관련된 사람들은 누구일까? 먼저 양쪽 선수들이 있고, 경기를 진행하는 심판진이 있다. 방송으로 경기를 중계하고 해설하는 사람이 있다. 끝으로 경기를 보러 오거나 텔레비젼을 통해 시청하는 관중이 있다. 축구는 관중과 시청자들이 내는 돈(광고 포함)으로 운영이 된다. 양쪽 선수들이 기량을 닦아 정해진 규칙에 따라 정정당당하게 겨뤄야 한다. 심판진도 규칙을 합리적으로 적용하여 불편부당하게 경기를 진행해야 한다. 해설자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관중(시청자)은 그런 멋진 경기를 즐기면서 댓가를 기꺼이 지불하는 것이다. 결국 축구경기의 수요자는 관중이며, 축구경기는 그들을 위해 열려야 한다.
그런데 선수들이 기량을 닦지 않고 잔재주로 일관하면 어떻게 될까? “동네축구”와 “뻥축구”와 “헛발질 축구”를 누가 즐기겠는가? 기량과 경험은 있으나 정당하게 사용하지 않고 남용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침대축구”든 “헐리웃 액션”이든 선수들이 요령만 피운다면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심판의 눈을 속여 상대방을 걷어 차고, 팔꿈치로 찍고, 시비를 걸어 화나게 하고, 손으로 공을 잡고, 반칙을 당했다며 뒹구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실력이 부족한데도 안간힘을 쓰면서 상대방을 붙잡고 늘어지는 모습은 그나마 애처로움이라도 있다. 재능을 다 가진 자가 쓸데없이 공을 돌려 시간을 끌거나 거짓으로 상대방과 심판진을 속이는 모습은 역겨움 그 자체다. 하물며 돈을 받고 경기 결과를 조작하는 일임에랴...
또 심판진이 대놓고 한쪽 편을 들어 불공정하고 부당한 판정을 내리면 경기는 난장판이 되기 십상이다. 심판도 사람인 이상 실수를 피할 수는 없지만 그런 범위를 벗어난 판정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침대축구”는 심판의 의지로도 쉽게 줄일 수 있다. 예컨대, 아프다고 드러누웠으니 바로 밖으로 내보내거나 경고를 주고, 추가시간에는 “침대축구”로 지연된 시간의 세 배를 더 주는 관행을 도입한다. 한편 쓸데없이 양쪽 선수를 자극하고, 물리력으로 경기를 방해하는 관중도 구역질나게 한다. 한번 잘 했다고 영웅으로 치켜세웠다가 헛발질 한번에 역적으로 몰아붙이는 순진함은 그나마 양반이다. 술에 취해 물건을 던지거나 경기장에 들어가는 부류는 경기는 물론이려니와 모두의 안전을 해치는 악당들이다.
이 모두가 스포츠 자본주의나 상업화된 프로 스포츠의 정치경제학이다. 한편으로는 선수들이 꾸준히 기량을 연마하도록 격려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경쟁을 통해 이기는 경기를 강요한다. 기량에 따라 선수의 품값이 매겨지고 승부에 따라 몸값이 정해지면서 놀이의 규칙(rules of a game)이 달라진 것이다. 축구가 관중을 위한 경기가 아니라 돈을 위한 경기가 된 것이다. 멋진 경기가 아니라 이기는 경기가 환영받는다. 관중들에게 욕을 먹더라도 승리를 해서 돈을 챙기는 것이 “장땡”인 세상이 된 것이다. 각종 스포츠 관련 복권도 이런 돈잔치를 부추긴다. 갈수록 선수도, 심판도, 관중도 운동경기가 주는 참된 맛을 잊고 그저 돈을 바라볼 뿐이다.
정치 경기의 주인은 백성이다
이런 면에서 축구 경기는 민주주의 정치 경기와 비슷하다. 경기장은 의회나 국회다. 양쪽 선수들은 말하자면 여당과 야당 의원들이다. 백성들이 기대하는 정책을 갈고 닦아 의회에서 경쟁하여 자신들의 정책을 민다. 심판진은 대통령과 행정부에 해당한다. 당파성에서 벗어나 합리성을 따져 일을 추진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언론과 시민사회도 정치를 논평하며 여론을 이끈다. 축구에서 관중이 있다면 정치에서는 백성이 있다. 그들이 대표들을 뽑아 의회로 보내고 세금을 내어 선수와 심판진을 먹여살린다. 따라서 민주주의라는 정치 경기는 당연히 백성들을 위해서 치러져야 한다.
하지만 우리들이 경험하는 정치 경기는 교과서에 적힌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 일단 선수들의 기량이 편차가 큰 가운데 수준 미달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들의 배경과 이해관계가 백성들과는 거리가 멀다. 세금을 떼어먹고, 군복무를 하지 않고, 범죄를 저지른 비율이 현저하게 높다. 전문 지식은 커녕 일반 상식도 갖추지 못한 자들도 적지 않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듣고, 그 좋고 나쁨을 평가해서, 나름의 의견을 정리하고, 그것을 조리있게 말해서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자가 드물다. 허구헌날 “뻥축구”에 “헛발질”이니 백성들이 볼 때도 그저 딱하고 안쓰러울 뿐이다.
개중에 말이나 좀 하는 부류들은 잔머리를 굴려 상대를 속이고 골려먹는 술수를 부린다. 상대방의 말꼬리를 잡아 누명을 씌우고, “헐리우드 액션”으로 국면을 뒤바꾸고 “침대축구”(필리밥스터)로 의사진행을 방해한다. 기량이 준수하고 멀쩡한 의원도 이런 판에서는 도매금으로 넘어가게 되어 있다. 당선이 급하고 공천이 포도청이니 센 놈 편에 줄을 대고 건달들 마냥 패거리질을 한다. 멋진 재주를 가지고 있어도 마음껏 펼칠 수가 없다. 자유롭게 토론을 하고 합리성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머리끄댕이 잡고 아귀다툼을 하는 삼류 “동네축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나 총리나 정부 관료들은 정파를 떠나서 합리성에 따라 행정을 해나가야 한다. 그런데 행정부가 여당편을 들어 정치를 하게 되면 정치 경기는 망가지게 된다. 대통령이 여당을 지배하든, 여당이 대통령의 등에 올라타 채찍질을 하든 정치 경기가 벌어지는 의회는 개판이 된다. 여당이 다수가 되면 행정부를 등에 업고 야당이 뭐라 하든 일당 독재를 강행할 것이고, 야당이 다수가 되면 여당과 행정부는 구석에 몰려 발버둥칠 것이다. 두 경우 모두 멀쩡한 행정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독재정권은 의원들을 줄세워 통제할 뿐만 아니라 관료들을 줄세워 “기강”이라는 이름으로 정치를 강요한다. 여당이 아무리 반칙을 해도 호루라기를 불지 않고 야당에게는 잘못한 것이 없어도 노란딱지와 빨간 딱지를 아끼지 않는다. 언론과 시민사회까지 겁박하고 길들이기를 시도한다. 심판의 판정에 의문을 제기하면 유언비어 유포나 빨갱이라고 몰아붙인다. 또한 여당과 야당이 졸전을 거듭하면서 정부관료제를 견제하지 못하면 관료의 독재로 이어진다. 입법부는 입법부의 논리가 있고 행정부는 행정부 나름의 논리가 있는 법인데, 그 구분이 없이 승자가 독식을 하게 되면 민주주의는 없는 것이다.
정치가 백성들의 위한 경기인 만큼 궁극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도 백성이다. 하지만 백성들도 정치 경기에 제 몫을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정치에 무관심하고 아는 것이 없으면서 정치라는 말만 나오면 욕부터 내뱉으면서 미주알 고주알 훈수를 두는 사람들이 많다. 축구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으면서 경기가 잘 안풀리면 터무니없이 선수를 힐난하고 감독을 비난하는 사람들과 똑같다. 선수가 그렇게 쉬운 골기회를 날려버렸다고 발을 동동 구르고, 감독이 용병술이 없다며 누구를 빼고 누구를 넣으라고 악다구니를 쓴다. 자신은 공을 몰고가는 것도 골대 안으로 차넣는 것도 형편없으면서 선수값을 하라며 다그친다. 토론회든 공청회든 눈꼽만한 관심도 두지 않고 투표장도 거들떠 보지도 않는 사람들이 정치를 혐오하고 정치인을 저주한다. 주인이, 주권자가 바로 자신임을 스스로 부정하는 어리석음이자 누워 침뱉기다.
또한 예산은 먼저 빼먹는 놈이 임자라며 공직자들에게 이런 저런 압력을 넣는 사람도 있고, 정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여기 저기를 기웃거리면서 주머니를 채우는 사람도 있다. 영문도 모른 채 모임에 가서 정치인에게 밥과 술을 얻어 먹고 선물을 받는 것은 차라리 순진하다. 돈을 받고 집회에 참석하거나 반대시위를 벌이기도 한다. 외치는 구호가 무슨 뜻인지는 관심사항이 아니다. 드물게는 용팔이 사건처럼 정치인의 하수인이 되어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맘에 들지 않는다고 깡통을 던지거나 운동장으로 내려가 난동을 부리는 자들과 다를 바 없다. 정치를 왜곡하고 망가뜨리는 자들이다. 나쁜 정치가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에 대한 백성들의 혐오를 가중시키고 정치판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데 한 몫을 담당한다.
경제라는 경기도 비슷하다. 경제라는 운동장에서 뛰는 선수들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혹은 자영업자다. 심판은 정부 (입법, 사법, 행정부) 혹은 시민사회이다. 경제를 지켜보면서 즐기는 관중은 소비자들이다. 하지만 “갑질”로 표현되는 대기업의 횡포는 경제라는 운동장이 처음부터 기울어져 있음을 말한다. 말하자면 프로 선수와 초등학교 선수들의 경기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경제에서는 “침대축구”든 “헛리웃 엑션”이든 대기업의 전유물이다. 약육강식 논리 그대로다. 이런 불공정한 경기를 막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바다에 플랑크톤이 없으면 멸치도 없고 조기도 없는 것처럼(2008: 675), 중소기업이 없으면 대기업이 위태롭다. 그래서 정부와 대기업은 공생을 외치지만 그때 뿐이고 “갑질”은 쭉 계속된다.
주인인 관중과 백성이 하기 나름이다
축구나 정치에서 추잡한 반칙, “침대축구,” “헐리웃 엑션”을 뿌리뽑으려면 관중과 백성들이 나서야 한다. 그들이 경기의 주인이고 정치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관중과 백성의 수준이 경기와 정치의 수준을 결정한다. 정치인과 공직자는 백성들의 심부름꾼이다. 이런 영악한 머슴을 제대로 부리려면 주인이 부지런히 공부하고 열심히 행동해야 한다. 말하자면 주인값을 해야 한다.
관중이 경기를 즐길 줄 알아야 하듯이, 백성도 정치 결과에 상심하지 말고 정치 과정에 관심을 갖아야 한다. 공부하고 생각한 대로 시시비비를 가려서 반칙왕을 퇴출시켜야 한다. 신중하게 토론을 지켜보고, 공청회에 참석하고, 투표에도 참여해야 한다. 그래야 머슴들이 주인을 얕보지 않는다. 또한 정당이나 시민단체에 후원금도 내고 원하는 것을 말하는 주인의 행동이 필요하다.
인용: 박헌명. 2016. "침대축구"를 보면서 정치 경기를 생각하다. <최소주의행정학> 1(8):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