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을 초월한 박근혜와 최순실의 엽기 행각이 사람들을 놀래키고, 분노케 하고, 좌절시키고, 분열시키고 있다. 뜬금없이 “창조”를 말했지만 비선과 비정상으로 꼼꼼하게 챙겨낸 변태 추문이었다. 현재로서는 그 추문의 끝이 어딘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국민 행복 시대를 열겠다고 기염氣焰을 토했지만 단지 그들만의 행복 시대였다. 밑도 끝도 없이 “미래”를 말했지만 박씨의 아버지가 총맞아 죽었던 유신 독재 시절로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렸다.
이성과 상식과 염치를 기대할 수 없는 자들이다.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정부 관료제를 멋대로 부려먹은 자들이다. 장난감처럼 갖고 놀다가 망가뜨린 자들이다. 공직사회를 제멋대로 흔들어 기강을 무너뜨린 자들이다. 어찌하여 관료제와 공직자들이 그리도 속절없이 휘둘렸단 말인가?
권한 침해와 행정의 합리주의 현상
이문영(1980)은 정부의 행정과정에서 “합리주의 현상”이 발생하거나 계속되지 못하는 것은 “권한 침해” 때문이라고 단언했다(6쪽). 권한 침해는 “아랫사람이 고유하게 갖는 권한을 윗사람이 부당하게 빼앗는 관행”을 말하는데(이문영 2001: 111), 권위주의나 관료주의 문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예컨대, “정치의 행정에 대한 극도의 간섭증, 엽관주의, 상급기관이나 상급자의 하급기관이나 하급자에 대한 권한 남용, 예산의 편성과 집행에[서] 업무담당기관이 아닌 … 예산기관의 횡포” 등이다(이문영 1980: 6).
권한 침해는 웨버(Max Weber)가 합리성을 가장 잘 갖춘 형태로 묘사한 관료제 이상형(ideal type bureaucracy)과 거리가 멀다. 업무가 기능에 따라 분명하게 나뉘어 지고, 자의성이 배제된 합당한 규칙에 따라 조직이 통제되고,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이 계약에 의해 자리에 임명되고, 업무 성과에 따라서 승진이 이루어지는 관료제의 특성을 해체한다. 단지 아랫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의 직책과 권한을 무시한다면 업무가 분화되지 않은 것이고, 합의된 규칙은 적용되지 않으며, 전문 지식은 인정되지 않고 (웃사람이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며 허세를 부리면서 만능 전문가 행세를 하고), 성과가 아닌 위계질서에 의한 무조건 상명하복으로 승진이 결정된다는 뜻이다. 누가 웃사람이 되느냐, 누가 권력을 장악하느냐에 따라서 관료제가 좌우된다는 뜻이다.
박근혜와 최순실의 권한 침해는 정부 관료제를 넘어서 민간기업과 예술인에게까지 미친 엽기와 변태였다. 公과 私를 넘나든 이른바 “갑질”의 최고봉이었다. 공무원 인사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것은 물론이고 최씨 존재를 언급하는 것조차도 금기시하고 보복을 가했다. 무자비한 폭력 그 자체였다. 이런 관료제에서 행정은 예측가능성과 연속성과 안정성을 가질 수가 없다. 언제 어떤 이유로 어떻게 자리에서 쫓겨나갈 지 알 수 없다. 힘센 자들의 “갑질” 때문에 이성과 상식을 따라 일하기 어렵다. 공직자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게 된다. 공직자들이 전문성과 자율성을 가진 관료가 아닌 그저 “네 네”하는 심부름꾼이 될 것을 강요받는다. 독재자 편에 줄설 것을 강요하는 관료제는 좋은 경험을 축적시키지 못하고 합리주의를 구현할 수 없게 된다.
합리주의는 행정이 가야할 길
그러면 왜 합리주의인가? 그것이 행정이 지향해야 할 방향이자 걸어가야 할 “제 길”이기 때문이다(이문영 1980: viii). 官의 권력 남용과 民의 무책임한 행동을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문영(1980)은 벌거벗은 힘(naked power)과 “난동을 불사하는 힘”이 부딪히는 원색적인 대결을 피하고 “관의 정책과 민의 평화”가 호응하는 합리적 관계로 발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vii쪽). 官이 “옷을 입[은] 힘”을 행사하고 民이 자율성이 있는 시민사회를 형성하고, 백성의 정당한 의견과 요구를 정부가 존중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양자 간 피를 보는 사태를 피할 수 있다(vii쪽).
결국은 官의 권력 남용과 民의 난동은 모두 폭력인데, 이런 극단의 폭력이 난무하는 데서 합리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러한 폭력을 극복하기 위하여 비폭력을 대안으로 내세운다. 통치자와 공무원이 권력 남용을 억제하고 백성들이 난동을 자제하는 것이다. 주먹질과 발길질을 멈추고 합당한 말로 사실과 진리를 다투는 것이 바로 비폭력이다. 그런데 官의 비폭력보다도 民의 비폭력이 훨씬 중요하다. “民의 좋은 행동을 官이 배우며 官의 나쁜 행동을 民이 배운다”(이문영 1990: 29). 원래 官은 좋은 행동을 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29쪽). 주인이 부지런하고 모범을 보여야 머슴들의 못된 버르장머리를 고쳐서 제대로 부릴 수 있다는 뜻이다. “주인인 국민이 만들어내는 감동, … 국민의 合理性的 抵抗, 祝祭분위기의 편재가 국민의 종인 통치자를 변하게 만든다”(이문영 1991: 30).
물론 비폭력이 궁극의 목표는 아니다. 정부 관료제에서 합리주의나 합리성을 만들고 가꾸어 나가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다. “폭력과 비폭력의 중간가치는 합리성 rationality이다”(1991: 118). 헤겔의 역사발전논리로 치자면 폭력은 정正(thesis), 비폭력은 반反(antithesis), 제 3의 가치인 합리성은 합合(synthesis)에 해당한다(이문영 1991: 30). 모순이 있는 상태를 부정하여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이다. 모순을 부정하는 反이 없이는 合에 이를 수가 없기 때문에 合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으로 反을 내세운다(30쪽). 따라서 비폭력, 개인윤리, 사회윤리, 자기희생으로 이어지는 이문영의 초월윤리는 合인 합리성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反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30쪽).
공무원 이상형의 행동강령
이문영은 행정개혁은 (1) 인간계발을 위한 환경 조성 (권한 보장 작업), (2) 과학적 관리와 인간관계 향상, 그리고 (3) 적극적인 인간계발 단계를 거친다고 보았다(이문영 1980: 4). 그런데 처음 두 단계에서 성공을 하는 것은 소극적인 행정조치일 뿐이어서 행정개혁을 완수完遂하기에는 부족하다(7쪽). 궁극적인 힘은 사람에게서만 나오는데, “무엇에나 ‘네, 네’ 하는 사람이나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좀더 독립적이며 자신을 갖고 있으며 근면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열심히 탐색하는 사람”이 필요하다(7쪽). 이문영은 이러한 공무원 이상형이 따라야 할 행동강령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2001: 277, 465; 2008: 561).
- 공무원이 일을 하는‘방법’은 전문 지식(능률과 민주주의 이념 포함)을 매일매일 닦아서, 이 학문을 갖고서 조직 내에서는 상사를 존중하며 조직 밖에서는 국민에게 봉사하는 것이지, 전문지식을 연마하지 않고 다만 상사에게 굴종하며 조직 밖의 국민들에게는 교만하는 것이 아니다.
- 공무원이 할‘일’이란 민주·복지국가와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지, 상사에게 상납하는 대가로‘이’(利)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 공무원인‘사람’이란 전문 지식(능률과 민주주의 이념 포함) 앞에 서는 존귀한 존재이지, 상사와 조직 앞에 세워지는 존재가 아니다.
박근혜 최순실 추문에서 우리가 뼈아프게 반성해야 하는 것은 그들의 “권한 침해”나 과학적 관리 실패가 아니다. 물론 공사公私를 구분못하고 제멋대로 관료제를 휘젓은 것은 명백한 죄악이다. 하지만 “공무원 이상형”에 가깝게 행동했던 공직자가 드물었다는 사실이 비수匕首가 되어 행정학의 가슴을 찌른다.
전문 지식을 닦아서 상사를 존중하고 국민에게 봉사한 것이 아니라, 공직자 대부분은 전문 지식을 내팽개치거나 악용하였고 부당한 지시를 내리는 상사에게 굴종하고 국민들에게는 교만했다. 국민의 기본권과 복지를 신장하고 정의를 실현한 것이 아니라 상사의 부당한 명령까지도 복종하는 대가로 이득을 챙겼다. 자율성을 가지고 전문성 앞에 당당하게 서는 공직자가 아니라 그저 상사와 조직에게 쓰여지고 버려지는 소모품이나 도구를 자처했다. 안종범 전 경제수석비서관과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모습이 대조되는 이유다.
비루한 고위 공직자의 자화상
특별히 고등고시나 사법고시에 합격하거나 박사학위까지 취득하고 득의양양得意揚揚했던 고위 공직자들을 생각한다. 그들의 비굴한 처신은 사람들을 참담하게 한다. 그들의 전문 지식이란 것이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기는 커녕 출세와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쓰였을 뿐이다. 그들은 특혜와 특권을 누리는 데에는 “염치불구”였고, 전문성에 걸맞는 사회 윤리와 책임은 나몰라라 했다. 공학도라면서 산소가스 이산화가스라는 박씨와 “심신이 회폐”한 “최선생님” 앞에만 서면 바짝 쪼그라들어 오금도 펴지 못하는 전문성이라니... 한때 하늘을 찔렀을 자존심과 자부심은 다 어디에 내팽개쳤단 말인가?
청문회에 나와서도 모른다거나 기억이 안난다거나 누가 봐도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은 고위 공직자와 자칭 사회 지도층을 기억한다. 걸핏하면 나랏 일을 한다며, 혹은 공인이라며, 혹은 사회 발전에 기여해왔다며 온갖 공치사란 공치사는 다 늘어놓았던 자들 아닌가. 이런 자들의 비루한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느꼈을까?
인용하기: 박헌명. 2017. 독재자의 권한 침해와 관료제의 합리주의. <최소주의행정학> 2(2):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