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n Young Lee

월간
 
최소주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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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5일 김어준의 파파이스(144회)에 출연한 유시민씨가 새 정부가 들어서면 무엇을 할 생각인지 밝혔다. 최근까지 국무총리로 청원되거나 “강제 소환”되는 압박을 받아온 그였다. 그런데 그의 답변은, “저는 공무원이 될 생각이 없어요. … 헛물켜지 마세요. … 저가 진보어용지식인이 되려고요. 진보어용지식인요.”

이 말을 듣고 나는 가슴이 먹먹했다. 노무현씨가 서거했을 때 세상이 무너진 듯이 절규하고 원망어린 눈빛을 화살처럼 쏘아내던 그였다. 그런 그가 진보어용지식인이 되겠다고 태연히 그리고 담담히 말했다. 깊은 곳에 박힌 가시를 품고 사는 자의 아픔이 묻어나온다. 아야 소리조차 뼈를 저미는 고통으로 다가오는 그런….

“저가 진보어용지식인이 되려고요”

유시민은 말한다. 정권이 바뀌었다지만 사실 대통령만 바뀌었다고. 정치권력만 잡은 것이지 기득권을 대변하는 언론권력, 재벌권력, 지식인 집단 다 그대로라고. 여소야대라는 국회권력도 정말 어려운 상황이라고. “모든 기득권 권력이 그대로 있고 그 기득권 권력의 네트워크 안에 한 매듭만 딱 바뀌는 건데. 지금까서 선거과정에서 편들어 줬던 여러 세력들이 또 자기의 논리에 의해서 맘에 안드는 게 있으면 공격해요. 열 개의 사안에서 아홉 개 지지해도 한 개 내 맘에 안드는 게 있으면 다 때린다구요. 저는 그게 제일 무섭고요. 지금도. 그 악몽이 또 되풀이 되면 거의 99프로 망한다 그렇게 봐요.” 그의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참여정부시절에 정부에 있을 때 또 여당에 있을 때 제일 힘들었던 게 편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힘이 들었던 것이 아니고 객관적으로 해주는 지식인들이 너무 없는 것예요. 언론인 지식인이. 그게 너무 힘들었거든요. 제가 어용지식인이 되겠다는 게 무조건 편드는 사람이 되겠다는 게 아니라…. 정말 사실에 의거해서 제대로 비판하고 제대로 옹호하고 이렇게 하는 사람이 그래도 한 명은 있어야 되지 않냐.”

이러한 최소주의 발언이 소리없는 한맺힌 절규로 들린다. 공정하게 공과를 따져준 지식인이 한 명도 없이 수구 기득권 집단에게 무방비로 줘터지고 짓밟힌 노무현 정권의 한이 느껴진다. “지못미(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라 했던가…. 그의 핏발서린 눈빛은 8년 세월에 바래지고 평온을 되찾았지만 뼈속 깊이 박혀있는 회한悔恨은 그대로다.

“무릇 지식인이거나 언론인이면 권력과는 거리를 둬야 [하]고 권력에 대해서 비판적이어야 [하]고. 그것은 옳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대통령만 바뀌는 거예요. 다 그대로 있고. 대통령은 권력자가 맞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예요. 대통령보다 더 오래 살아 남고 바꿀 수도 없고 더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기득권 권력들이 사방에 포진하고 연합해서 또 괴롭힐 것이기 때문에 … 범진보의 정부에 대해서 어용진보지식인이 되려고요.”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야”

한 때 모든 것을 노무현 탓으로 돌리던 시절이 있었다. 야당 여당 할 것 없이 노무현을 비난했다. 수구기회주의 언론은 물론이려니와 소위 진보언론이라는 <한겨레신문>마저도 날마다 매질을 해댔다. 무방비로 난타당하는 동네북 신세였다. 하다 못해 걸어가다 돌부리에 걸려도, 비가 와도 다 노무현 때문이라고들 했다 (조기숙 2012: 95). 마치 “노무현 욕하기 올림픽”이 열린 듯이 너도 나도 뛰어들었다. 2003년 잠깐 부모님댁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나는 이런 사회 분위기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냥 출신이 미천한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기득권층의 유치한 몽니로 생각했다. 도올선생님 말마따나 좀 한다는 집안에 며느리가 덜컥 들어왔는데, 집안도 학력도 인물도 변변찮은 며느리를 콧대높은 시어머니가 얼마나 무시하고 미워하고 저주하겠는가.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지식인들조차도 노무현 욕하기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2002년 월드컵에서 축구 대표팀을 응원하듯 “노무현 욕하기 월드컵”에서 온갖 재주를 뽐내고 있었다. 학자의 입에서 참여 정부가 “좌파 민주주의”고 “운동권 정권”이고 “아마추어 정권”이라는 소리가 나왔다. 정권은 커녕 기본도 안된 형편없는 패거리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내게는 다르게 들렸다. 고졸이고 그것도 상고출신이고 언행이 기존 기득권의 품격과 거리가 먼 천것이라는 소리를 하고 싶은데, 자존심이 상하니까 차마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노무현씨가 무엇을 어찌 잘못했기에 그리 깎아내리냐는 말에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나 “노빠”냐는 비아냥이 돌아왔다.

유시민씨의 말이 가슴에 팍 꽂히는 까닭이다. “진보 지식인들은 언제나 권력과 거리를 두고 고고하고 깨끗하게 지내야 되잖아요. 지식인은 권력에 굴종하면 안되지. 이래가지고 사정없이 깔 거라고. 전에도 그랬잖아요.” 참여정부가 초장부터 교육부의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파동, KBS사장 임명 파동, 화물연대 파업, 부안핵폐기장 파동 등으로 얻어터져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주로 노무현씨를 지지했던 진보 세력이 공격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 아팠다고 그는 회고했다. 당시 나는 궁금했다. 도대체 노무현은 무엇을 잘못했길래 저런 처참한 비난을 받는 것인가?

노무현은 무엇을 잘못했는가?

나는 노무현씨에 대한 비난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여당 내에서도 비난에 직면했던 노무현씨가 좋은 인재를 뽑아서 일을 추진하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미숙한 점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추어 정권”이라는 비난은 지나치다.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국회의원이고 장관이고 대통령이었나? 그러면 30년 가까이 해먹은 박정희 정권같은 “프로 정권”을 원하는가?1) 또 아무리 의도가 선해도 사람의 일이 모두 잘 되어가기를 기대할 수도 없는 일이다. 프로인 박정희 정권은 하는 일마다 매끄럽게 추진되었고 매번 성공했는가? 소위 운동권 출신을 청와대에 기용해서 “운동권 정부”라면 각종 비리와 전과가 있는 자들을 장관에 기용하면 “비리 전과자 정부”인가? 아무리 논란이 있다 해도 6억원 이상 부동산에 대하여 중과세하는 것이 “좌파 민주주의”란 말인가? 다 쓰러져가는 달동네에 사는 노인네들이 모여앉아 “종부세”를 한탄하며 노무현을 죽일 놈 만드는 것이 좌파 정권인가? 학문이 아닌 상식 선에서 봐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기껏해야 기득권을 틀어 쥔 세력들의 삐딱한 시기심이나 화풀이나 모략질(여럿이 작당을 해서 한 사람을 바보 만드는 짓)로 보였다.

어느날 나는 고대 병원에서 투석透析 중인 소정 선생님을 찾아뵙고 노무현씨의 잘못을 여쭈었다. 선생님은 한마디로 “과도한 참여”라고 말씀하셨다(이문영 2008: 518). 노무현씨가 말이 너무 많고 과격하다는 말씀이셨다. 예를 들면, 노건평씨 사건 때 구차하게 형님을 편드는 얘기를 하지 말고 그냥 검찰이 법대로 조사해서 처리하는 것이라고만 말했어야 했다(박헌명 2016: 3). “한마디로 나는 오늘의 세상에 말이 많은 것도 걱정이 된다. 그런데 이 말들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개인적인 이익을 얻고자 하는 말이다” (이문영 2008: 615). 꼭 긴요하고 꼭 맞는 말만을 최소로 하라는 말씀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문영 (2008)은 “나는 헌법재판소가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을 기각한다고 결정한 뒤에 대통령이 신중하게 행동하지 않았던 것을 과격이라고 본다. 자신을 대통령으로 살려준 헌법재판소가 신행정수도를 옮기는 일에 위헌 결정을 내렸을 때 대통령이, ‘나는 관습법이라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했다’라고 발언했던 것이 과격이다” 라고 적었다 (576쪽).2) 나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미심쩍은 속내를 깨끗이 풀어내지는 못했다.

소피스트와 386세대의 과격

이문영(2008)은 ‘국민의 정부’는 측근 정치를 다스리지 못해 부패가 만연했고, ‘참여정부’는 여당인 민주당을 분열시키고 북한에 대한 과격한 조치를 취해 민심을 잃었다고 했다 (661쪽). 또 노무현씨가 좌파를 포함한 기회주의자들을 단속하지 못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했다 (574 쪽). 선생님은 이들을 잇속(욕심)이나 챙기는 소피스트나 대중영합주의자로 불렀다 (544, 618쪽).3) “… 나는 밭에는 돌이 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밭의 대부분은 흙이 메우지만 돌이 좀 있는 것은 문제가 안된다. 문제는 흙이 적고 돌 천지인 경우이다. … 기회주의자도 있을 수 있고 좌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치의 밭에서 정치를 주도하는 것은 ‘흙’이어야 한다” (574-575 쪽).4)

이문영(2008)은 참여정부를 주도한 386세대가 1970년대 민주화운동이나 햇볕정책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663쪽).5) “…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악한 정부의 이성이 거절하지 못하는 발언과 행동을 하여 해직과 옥고를 치른 1970년대 운동의 불씨를 잘 살려냈어야 했다. ... 노무현 정부는 이른바 386세대를 자랑했는데, 386세대는 가장 무서웠던 때인 1970년대에 민주화운동을 한 이들이 아니었다” (582쪽). “1980년대는 1970년대보다 덜 실존적이며 덜 무서운 때였기 때문에 국민의 요구가 과다해졌고 과다한 요구만큼 잇속을 챙기려는 움직임도 더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662쪽).

나는 소정 선생님의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중도 보수인 선생님의 입장에서 (500쪽) 권위주의를 파괴하고 격의隔意없이 일반 시민과 눈맞추는 지도자가 탐탁찮고, 세상이 뒤집어진 듯 (어제까지도 강자의 폭압에 눌려지냈던 자들이) 너도 나도 자기 몫을 주장하고 나서는 무질서함을 마땅찮아 하셨으리라.

반면 아직도 노무현이라면 치를 떨고 저주를 쏟아내는 기득권 세력의 “악다구니”에서 합리성을 눈꼽만큼도 찾기 어렵다. 각종 수치를 보아도 그들이 그토록 비난했던 참여정부보다 이명박근혜 정권이 훨씬 못미쳤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연극을 빙자한 <환생경제>에서 쏟아냈던 “노가리”, “육시랄 놈”, “사나이로 태어났으면 불알 값을...”, “거시기 달고 다닐 자격도 없는 놈” 등의 욕지거리를 반성하지 않는다. 그런 “창조욕설”을 들으면서 박장대소를 하던 박근혜씨는 이제 수갑을 찬 채 부시시한 올림머리를 하고 깡마른 표정으로 재판정에 들어서는 피의자가 되었다. 義가 아닌 利를 탐한 “장사치 정권”과 스스로 비정상이면서 정상이라고 우겨댄 “엽기 변태 정권”아니었던가.

내가 경험한 지식인들의 노무현 욕하기는 왕따를 당하지 않기 위해 월드컵 열기에 휩쓸려 얼떨결에 “대-한민국”을 외치는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이명박근혜 정권을 비판하는데 지극히 인색했다. 생각컨대, 노무현씨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강력한 기득권 세력에 맞서다 처참하게 짓밟혔고, 그들의 “노무현 왕따” 전략(혹은 프레임)에 걸려들어 철저하게 배신당하고 난도질당하고 유린당했다고 보는 편이 더 합당해 보인다.

출처: 이문영(1980: vii-viii, 10)에서 재구성함.
民 (시민사회)官 (정부)
좋은 힘정당한 요구를 하는 사회집단‘옷을 입[은] 힘’
좋은 가치자율성, 책임성합리화한 구조
나쁜 힘난동을 불사하는 힘‘벌거벗은 힘’
나쁜 행동무책임한 행동 (난동)권력 남용 (폭정)
변화하는 힘최소주의 (과도한 요구 자제)사회집단의 건전한 압력
원색적 대결 결과민의 亂動 (혼란)관의 溫情 (恣意) (비효율)
합리적 관계 결과민의 평화관의 정책

“과도한 참여”란 무슨 뜻일까?

소정 선생님은 참여정부가 끝까지 참을 줄 몰랐다고 하셨다 (이문영 2008: 520). 나는 “과도한 참여”나 “과격”이라는 비판을 어렴풋이만 이해했다. 말을 교묘하게 잘하고 낯빛만 좋은 사람 치고 인자한 사람이 드물다(巧言令色 鮮矣仁)는 <論語> 學而篇을 선생님께서 종종 말씀하신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386세대와 소피스트와 사학재단의 재산권 등에 관해서는 의구심을 해소하지 못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좋아하시던 <孔孟> (梁惠王下)를 다시 읽으면서 선생님께서 비판하신 참여정부의 “과도한 참여”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백성이) 즐거움을 못얻었다고 해서 그의 上을 비난하는 것도 잘못이며, 백성의 위에 있으면서 백성과 동락하지 않는 것도 잘못이다 (不得而非其上者非也 爲民上而不與民樂者亦非也).”

이문영(2008)은 “... 과격한 정부와 ‘부패하고 분열하는 국민’이, 말하자면 코드가 맞아서, 한덩어리가 되어 그 과격함이 극에 달하게 된다”고 적었다 (578쪽). 꼭 독재정권이 아니어도 순리를 거슬러 급격하고 과격한 정책을 펴는 정부도 문제이지만 공동체보다는 자신의 잇속만을 탐하려 이합집산하는 시민사회도 과격한 것은 마찬가지다. 이런 생각의 원형은 선생님의 <한국행정론> 서론에서 발견할 수 있다.

“... 자율성이 있는 社會團體의 형성을 주장하는 근본 취지는 官의 권력 남용을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벌거벗은 힘’naked power과 民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하는‘亂動을 불사하는 힘’과의 原色的인 對決을 회피하는 데 있다. … 原色的 對決의 결과는 혼란이며 이런 기회를 이용할 이는 정치면에서 극우와 좌익의 정치 단체들 뿐이다. 官·民 兩者의 원색적 대결을 회피하는 길은 좀더 合理化한 統治行政構造가 官쪽에서, 그리고 自律性 있는 社會集團[가] 民쪽에서 각각 형성되며, 후자에서 전자에 이르는 輿論과 要求의 供給路가 마련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문영 1980: vii).

“과도한 참여”라는 소정 선생님의 비판은 단지 참여정부와 노무현씨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참여정부가 박정희와 전두환과 같은 군사독재처럼 권력을 남용하고 벌거벗은 힘을 휘둘렀다는 것이 아니다. 기회주의 언론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도 필요없는 말을 해서 불란을 자초하였다. 물론 대개는 “대통령 못해먹겠다”처럼 진의를 왜곡시킨 단장취의斷章取義와 언론인과 지식인들의 침묵이 원인이었다. 그 결과 의도와 다르게 종종 낯설고 불편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아마도 시민보다 반 걸음이 아닌 서너 걸음을 앞서 간 죄이다.

“과도한 참여”는 참여정부와 사회에서 소화할 만한 수준을 넘어선 과도한 요구에 가깝다. 그동안 기득권 세력에 짓눌려온 백성들이 운좋게 건져낸 승리에 도취하여 과욕을 부린 것이다. 선거에서 이긴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민주주의가 완성된 것으로 착각하였다. 수구 기득권 세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지 못하고 자신이 뽑아놓은 노무현이 알아서 구악을 청산하고 국민통합 시대를 열어주리라 기대했다. 스스로가 약자이고 대통령조차도 약자인 것을 깨닫지 못했다. 대의를 잊고 자기 잇속만을 생각하여 제멋대로 목소리를 높였다.

진보세력은 선거가 끝나자마자 천신만고 끝에 겨우 대통령이 되어 의욕을 펼치려던 노무현을 앞장서서 괴롭히고 뒤흔들고 물어뜯어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유시민씨가 정말 힘들고 아팠던 대목이다. 기득권 세력의 파상 공세와 음흉한 “노무현 왕따” 전략에 진보 언론도 지식인도 넘어갔다. “노무현 욕하기”에 너도 나도 뛰어들었지만 그것이 수구 세력에게 농락당하는 어리석은 짓임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 노무현을 잃고 나서야 그 미련함이 자해행위였음을 깨닫고 “지못미”로 땅을 치고 통곡했다.

벌거벗은 힘을 가진 上의 포악이 아니라 한마디로 下의 난동이었다. 잇속을 참지 못하고 부당한 요구를 쏟아낸 시민사회의 “과도한 참여”였다. 그래서 이문영(1980)은 “벌거벗은 힘이 아닌 좀더 합리화한 統治·行政構造, 그리고 亂動을 不辭하는 힘이 아닌 정당한 요구를 제시하는 社會集團이 兩者[가] 납득할 만한 관계 형성을 우리가 公開的적으로 볼 수가 있을 때 우리의 行政과 政治는 비로소 제 길을 걷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viii)고 했다.

“강한 민주주의”와 시민사회

Strong Democracy (1984)의 저자 Benjamin Barber는 “[T]here can be no strong democratic legitimacy without ongoing talk” (p. 136)라고 말했다. 투표하고 나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든지 다음 선거까지 입닥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권자로서 끊임없이 토론과정을 통해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책을 찾고 대안을 만들고 선출된 자들이 하는 짓을 잘 관찰하고 꾸짖어야 강한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다는 소리다. 참여정부의 경우에는 정부의 못된 짓을 캐내어 고발하고 응징하는 것이 너무 지나쳤다. 정부가 능력이 부족하고 미숙한 점은 있었다 해도 그 무조건 반사에 가까운 비난과 저주는 전혀 합당하지 않았다. 시민사회는 자율성과 책임성을 가지고, 무책임한 요구와 과도한 참여를 자제했어야 했다. 기회주의 언론의 파상공세에 부화뇌동하지 말고 이성과 증거에 근거하여 공과를 객관적으로 따졌어야 했다. 이런 의미에서 “진보어용지식인”이 되겠다는 결심은 철저한 반성과 참회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진보어용지식인”이 되자

요즘 <노무현입니다>라는 영화가 인기다. 사람들이 노무현을 좋아하는 것은 그가 잘생겨서가 아니고 그가 내세우는 상식과 원칙 때문이다. 노무현씨는 개인의 실패를 아파했고, 그것으로 大義가 훼손되는 것을 못견뎌했다. 그래서 지지자들에게 자신을 버리라 했고, 그것도 부족해서 스스로를 버렸다. 어쩌면 그 자기희생이 광장의 촛불이 되어 상식과 원칙과 꿈을 밝혔는지 모른다. 이제 문재인이다. 참혹했던 지난 8년 세월에서 우리는 무슨 교훈을 얻어야 하는가?

먼저 녹록치 않은 지금 상황을 냉철하게 인식해야 한다. 적폐 청산 등 산적한 문제를 안고 있는 문재인 정부는 어쩌면 참여정부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지 모른다. 유시민씨 말대로 청와대만 바뀌고 언론, 정치, 경제, 사회 모든 것이 그대로다. 기득권 세력은 박근혜 최순실의 엽기 변태 행각 때문에 정권을 내줘을 뿐이다.

따라서 시민사회는 과도한 요구와 참여를 자제해야 한다. 참고 인내해야 한다. 자신의 잇속보다는 이웃과 공동체를 생각해야 한다. 노동조합으로 치면 한꺼번에 모든 것을 얻어내려 해서는 안된다. 당장은 괴롭더라도 참고 견디고 양보하고 기다리면서 얽힌 문제를 차근차근 풀어가야 한다.

또한 문재인과 박원순을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 예컨대, “주적”을 밝히라거나 동성애에 관한 의견을 내놓으라고 떼쓰지 말라. 이기적이고 성급하고 어리석은 행동이다. 기득권 세력에게 빌미를 주는 과격한 언동이다. 지난 촛불집회에서 깨달은 것처럼 분열하지 말고 서로 단결하고, 나만이 아닌 이웃을 배려하고, 과격한 행동을 자제하고 철저하게 비폭력으로 나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강한 민주주의는 “진보어용지식인”을 원한다. 권력을 감시한다는 뜻은 비난하라가 아니라 시시비비를 똑바로 따져서 일을 바로잡으라는 뜻이다. 무조건 편드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해서 공정하게 평가하고 정당한 요구를 하라는 뜻이다. 촛불을 응시하던 절실한 눈으로 관찰하고 공부하고 토론하여 지혜를 모으고 힘을 길러야 한다. 촛불을 지키는 “진보어용지식인”과 “진보어용언론인”이 되보자.

끝주

  1. 어느 고위 공무원은 청와대에서 지시하거나 보고를 받는 방식이 부당하거나 미숙할 때가 많았다고 비난했다. 운동권 출신이라 업무를 모르면서 우격다짐으로 자료를 내놓으라고 해서 옥신각신 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이명박근혜 정권에서는 행복하냐고 그 공무원에게 물었더니 말이 없었다. 참여정부 때에는 항의나 푸념이라도 했지만, 삽질정부와 변태정부에서는 비판은 커녕 찍소리도 못하고 꼬리를 내렸을 테니 말이다. 아마추어 문제가 아니라 그냥 노무현이 만만하고 재수없고 싫었던 것이다.
  2. “2004년 5월 14일 … 헌법재판소는 국회의 탄핵결정에 대해, 노 대통령에게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를 탄핵하면 ‘직무수행의 단절로 인한 국가적 손실과 국정 공백은 물론이고, 국론의 분열 현상, 즉 대통령을 지지하는 국민과 그렇지 않은 국민 간의 분열과 반목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라고 하며 기각을 결정했다. 나는 헌법재판소의 이러한 판결을 후진국 현상으로 본다. 다시 말하지만,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살아난 노 대통령이 그 후 같은 재판소가 연기·공주로 수도 이전하는 것을 위헌이라고 결정했을 때, 그 결정의 근거가 된 ‘관습법’이라는 개념을 자신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고 다수결표를 갖고서 이번에는 국회에서 신행정수도법을 2005년 3월 2일에 통과시켰다. 이런 일련의 조치는 ‘잇속’으로 움직이는 대중영합주의 정치 관행을 보여주며 정치의 후진성을 국민앞에 보여준 일이었다” (이문영 2008: 577).
  3. “틈만 나면 이 잇속을 최대한으로 추구한 세계가 바로 소크라테스가 기피한 소피스트의 세계였다는 것을 그 후에 알았고, ‘참여 정부’때 이런 소피스트가 횡행했다는 것도 그 후에야 알았다” (이문영 2008: 544).
  4. “내가 ‘참여정부’에 하고 싶은 충고는 다음과 같다. ‘좌파와 함께 가라. 그러나 좌파를 중심에 두지 말라.’ 이것이 ‘참여정부’를 잉태한 민주당의 자리였고, 대통령 경선을 주관한 김원기씨의 발언이었다. 옛날에 성을 공격하는 군대의 장군은 아래에 있는 병사들이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공을 세우려고 성급하게 성벽을 타고 올라가는 병사를 아래에서 직접 활을 쏘아 떨어뜨렸다” (이문영 2008: 575).
  5. “[한완상이] 편 현실적 이상주의론인 햇볕정책은 이러한 선통일 요구를 흡수하는 장치였다. 그러나 1980년대의 움직임이 흡수된 386세대는 ‘참여정부’ 때 외교의 공존을 무시하고 통일부터 하자고 얼마나 설쳐댔는지 모른다” (이문영 2008: 438). “햇볕정책은 남·북한의 교류와 공존을 도모하여 느슨한 협력관계를 이룬 뒤 통일국가를 전망하지는 정책이었다. 교류·공존은 하지 않고 통일부터 하자는 정책이 아니었다” (578쪽).

참고문헌

  1. 박헌명. 2016. 정세균 의장에게 무엇을 당부하셨을까? <최소주의 행정학> 1(10): 1-4.
  2. 조기숙. 2012. <문재인이 이긴다>. 서울: 리얼텍스트.
  3. Barber, Benjamin. R. 1984. Strong Democracy: Participatory Politics for a New Age.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인용하기: 박헌명. 2017. '진보어용지식인'과 강한 민주주의. <최소주의행정학> 2(5):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