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소정 선생님께서 사용하신 독특한 말글이 생각난다. “경우境遇”라는 표현이 있다. 사리나 도리에 부합하면 “경우가 맞다(옳다)”라고 하고, 아니면 “경우가 아니다”라고 한다. 어른들이 흔히 “경우가 바른(밝은) 사람” “경우없는 사람” 등으로 말씀하시곤 했다.
"경우에 맞는 성장"
소정 선생님은 <샘터> 1972년 7월호에 “경우에 맞는 성장”이라는 글을 쓰셨다. 대학졸업 후 취직을 하면 자신을 보살펴 준 부모나 식구들에게 먼저 값(학비)을 치르고 남은 돈으로 자기 생활을 꾸려야 한다. 취직턱으로 생색이나 내고 용돈을 좀 드리는 것은 경우에 맞지 않다. 셈이 틀렸다는 얘기다. 선생님은 자신이 마땅히 치러야 할 것을 제대로 치르고 나서 자기의 몫을 늘려 나가는 모습을 개인이나 국가에서 보고 싶다고 적었다(1986: 62). 신랑신부에게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으되 세금은 꼭 제대로 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씀을 오랫동안 곱씹어 생각했다. 치러야 할 값을 제대로 치른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요즘처럼 이 말씀이 가슴을 파고 든 적은 없었다. 한마디로 경우가 없는 언행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신문과 방송과 인터넷을 보기가 겁이 난다. 사실판단은 물론이려니와 듣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말이 아니라 고문이고 폭력이다. 가장 힘든 것은 경우없는 짓거리가 널려 있는데도 경우를 따지지 않고, 경우가 바른 언행인데도 경우없는 짓으로 매도되는 일이 계속된다는 점이다. 과연 경우에 대한 합의된 인식은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전두환과 검찰의 경우없는 셈법
경우가 없는 일을 몇가지 적어보자. 반란 수괴인 전두환은 80년 광주에서 게엄군이 헬기사격을 하여 민간인을 학살한 사실을 부정하고 간첩(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주장을 해서 다시 재판을 받고 있다. 건강이 안좋다면서도 골프를 치고 수하들과 만찬을 즐기던 자가 이제는 재판 출석도 멋대로 하겠다고 한다. 추징금 2천억원 중 8할 가까이를 내지 않고 통장에 달랑 29만원 뿐이라던 그는 취재중인 기자에게 돈을 대신 내달라고 했다. 무기징역을 사면해줬더니 돈보따리를 내놓으란다. 몰염치다. 자신이 마땅히 치러야 할 값은 뭉개고 자기 몫만 알뜰하게 챙기는 철면피의 모습에 다들 실망도 화도 아닌 한숨이다. 어찌하여 정치권, 정부, 언론은 이 살인마에게 경우(도리)를 가혹하게 묻지 않는 것일까?
어제 검찰은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을 직권남용과 권리행사방해 혐의로 기소했다. 그가 반부패부장이었던 2019년 김학의씨의 출금금지 과정을 수원지검이 조사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댄다. 김학의 성접대가 담긴 고화질 동영상을 보고도 두 번씩이나 무혐의로 사건을 덮었던 검찰이다. 대선배에 대한 충정으로 똘똘 뭉쳐 김씨의 공소시효를 기어코 완성하고 말았다. 이런 검찰이 외국으로 도망치려는 김씨의 출국을 막은 절차가 맞니 틀리니 하고 있다. 한마디로 경우없는 짓이다. 검찰은 먼저 김학의 무혐의 처분에 관련된 모든 검사들을 잡아들인 뒤 법조항과 절차를 하나하나 따져 정밀하게 발라냈어야 했다. 그런 연후에 출국금지가 법에 맞는지를 따졌어야 했다. 하도 검찰발 보도가 요란하니 이젠 이지검장이 마치 김학의 수사를 못하게 해서 기소되었거나, 검사가 아니라 패륜를 저지르고도 반성하지 않는 잡범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다. 이런 기세라면 이씨는 이미 최소한 무기징역이다. 만일 경우밝은 검사나 공수처가 이씨를 기소한 검사들을 기소절차에 문제가 있다고 입건하고, 수십차례 불러다 조사하고 기소하면 어떻게 될까? 털어서 먼지 안나는 검사가 있을까? 마땅히 치러야 할 값을 치르지 않고 제 몫만 챙기려다 곤욕을 겪게 생겼다.
경우없는 납세와 사면
지난 2년 간 집(아파트)값이 폭등했다. 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쏟아냈지만 집값을 잡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책의 효과를 면밀하게 분석하지 않고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몰아붙여서는 안된다. 부동산은 긴 시간을 살펴야 하며, 복잡한 인과관계가 얽혀있으며, 정보(돈)를 쥔 자들에게 휘둘리기 쉽다. 선거 결과에 놀라 마구잡이로 던지고 흔들면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다.
재미있는 것은 정부정책을 비난하는 자들이 내놓는 대안이다. 보유세를 내리고, 거래세를 줄이고, 대출규제를 풀자는 것이다. 집 한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종부세와 대출규제로 고통받고 있다고 한다. 세금폭탄이란다. 경우없는 요설이다. 침소봉대나 조작에 가깝다. 전국민의 1%이 종부세 대상인데, 그 절반이 100만원을 낸다. 종부세를 내리고 양도세를 줄여주면 누가 좋을 것인가? 1%의 부자와 다주택자들만 환호성을 지를 것이다. 특히 갭투자로 숨넘어가기 직전인 자들에게는 신의 은총이다. 마땅히 내야 할 양도세를 내지 않고 집을 팔아 큰 차익을 챙기게 될 테니 말이다.
집값이 올랐으면 그만큼 세금을 더 내는 것이 당연하다. 경우에 맞는 일이다. 세입자에게는 전세금대출을 받으라 하면서 왜 집부자들은 백만원이 없어 죽는다면서도 주택담보대출은 안받는가? 말은 많지만 결국은 세금내기 싫다는 소리다. 다주택자를 규제하고 집값을 안정시키는 정책을 끝없이 흔드는 이유가 있다. 시장을 교란하여 집값을 올려놓고 불로소득을 날로 먹으려는 심보다. 어리석은 “영끌”을 부추기며 정부의 헛발질을 유도하는 까닭이다.
삼성도 경우가 없는 것은 매한가지다. 이재용씨가 구속된 뒤 반도체가 어쩌니 코로나 백신이 어쩌니 하면서 사면을 거론한다. 수구세력도 거든다. 뇌물 86억원에 2년 6개월이면 헐값이건만 이마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겠다는 것 아닌가. 이런 셈법으로 장사하면 망한다. 전두환 하나로도 부족한가? 또 이건희씨가 사망한 뒤 12조원의 상속세를 어찌 낼 지 언론이 걱정한다. 정해진 상속세를 내는 것 뿐인데, 삼성이 미술품을 기부한다며 호들갑이다. 당연한 이씨의 납세가 영웅담이 된다. 그럼 이참에 몇 백조라도 화끈하게 쏘든가. 그래야 감옥에서 꺼내서 국민훈장이라도 안겨줄 것 아닌가... 呵呵. 제발이지 돈질·힘질도 좀 경우있게 하면 안되겠니?
인용하기: 박헌명. 2021. 경우없는 셈법과 납세와 사면. <최소주의행정학> 6(5):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