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지난 7월과 8월 제 23회 전국학생만화공모전을 개최했는데, 카툰부문에서 <윤석열차>가 금상(경기도지사상)을 차지하였다. 그런데 이 대회를 후원했던 문화체육관광부는 정치를 주제로 한 작품을 선정했다며 돌연 진흥원을 문책했다. 100억원 후원금이 달린 후원명칭 승인을 취소하겠다고 했다. 카툰 자체가 주로 정치를 풍자하는 그림인데 대체 뭔 소리란 말인가.
문학과 예술과 담을 쌓은 수구세력
국정감사에서 야당은 정부가 표현할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고 따졌다. 최순실·박근혜 정권의 블랙리스트를 떠올린다고 했다. 여당은 영국 만평가의 작품을 표절했다며 <윤석열차>를 깎아내렸다. 전직 검사였던 어느 의원은 “한눈에 봐도 표절”이라고 단언했다. 나는 작품을 보기도 전에 탄식했다. 첫째, <윤석열차>가 불순한 의도를 가졌다고 시비를 건 자들이 학생 작가를 노리개 삼아 자신들을 위한 정치질을 하고 있다. 설령 작품에 부족한 점이 있다 해도 나잇값 못하는 자들의 난동이다. 둘째, 문체부가 후원금을 미끼삼아 문화예술에 대해 시시콜콜 걸고 넘어지는 것이 수상하다. 최순실 사태를 겪고서도 이런 짓을 저지를 관료가 있을까? 철딱서니없는 어른들의 일탈로 어린 작가가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을 두려움과 무게감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보수와는 달리 수구세력은 문학과 예술과 담을 쌓은 듯하다. 어쩌면 그런 유전자를 물려받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주체할 수 없는 권력과 돈으로 무엇이든 마음껏 누린 업보다. 배고픈 고통을 모르고, 배우고 싶은 갈망도 갖지 못하고, 핍박받는 설움도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 간절함과 고마움을 느끼지 못한다. 속박이 있을 때에만 자유가 빛나는 법이다. 피눈물을 떨구는 좌절과 희열과 감동이 없으니 그들에게 문학과 예술은 기껏해야 마약과 같은 허무일 뿐이다. 작가가 담아낸 뜻과 감성을 읽어낼 능력이 없다. 아름다움과 추함을 느낄 수 없는 불감증 환자들이다. 분별력이 없다. 노무현씨를 막말로 뭉개버린 <환생경제>가 딱 그들의 수준이다. 맥락없는 욕지거리를 남발하면서 서로 희희락락했던 그들이다. 정적을 비난한답시고 그린 것들은 대부분 보기에도 섬뜩하다. 괴수, 늑대, 총구, 서슬퍼런 칼날, 잘려나간 목, 시뻘건 피... 유치하다. <달의 몰락>을 문재인씨의 하야로 믿고 목이 터져라 불러대는 늙어빠진 천둥벌거숭이들이다.
<윤석열차>는 좋은 창작품이다
하도 말들이 많아서 <윤석열차>을 보았다. 작가의 의도는 폭주하는 기차에 명료하게 드러났다. 훌륭한 비유다. 토마스와 전혀 다른 열차의 얼굴(무슨 짓을 해도 미운 윤씨), 김명신씨를 닮은 여성(수많은 의혹에도 해맑게 나대는 김씨), 칼을 든 검사병정(검찰공화국), 열차가 무너뜨린 건물(여가부도 경제도 외교도 국방도 망하는), 그리고 열차의 폭주에 놀라 달아나는 식구들(하루하루 삶이 망가지는 국민). 만일 열차 앞에 이재명, 김정은, 시진핑, 푸틴을 그려넣었다면 수구세력들은 눈물나게 감동했을 것이다. 이 만평은 권력자를 실랄하게 비판하지만 추접하거나 흉측하지 않다. 그 나이 또래의 깨어있는 눈으로 본 것이다. 정상인이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는 만평이다.
영국 작가의 그림은 전혀 다른 동기와 의도를 보여준다. 열차를 둘러싼 인물들과 열차가 가는 방향은 Brexit와 선거를 둘러싼 구역질나는 정치질을 말한다. 반면 <윤석열차>는 검찰공화국의 폭주로 망가지는 민생과 권력자의 역겨운 안하무인을 고발하고 있다. “윤석열차” 문구 옆에 널부러진 구두 한 짝은 작가의 동기를 추측케 한다. <윤석열차>를 보고 화를 낸다면 나만 존귀한 존재라면서 남을 업신여기는 자다. 자신은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나머지는 받들어 모실 의무만 있다는 식이다. 표절을 운운한다면 어떡하든 권력자를 위무하려는 자다. 잇속에 눈이 멀어 양심을 외면한 자다. 그림이든 노래든 연극이든 예술의 아름다움과는 무관하다. 해당 작가가 밝혔듯이 <윤석열차>는 표절도 아니고 저작권 침해도 아니다. 신선하고 재미있는 창작물이다.
왜 표현할 자유를 말하는가?
John Stuart Mill은 표현할 자유(freedom of speech)에서 얻을 수 있는 가치를 세가지로 요약했다(Levmore & Nussbaum, 2010). 첫째는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인간은 틀릴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기 때문에 다른 생각과 우열을 견줌으로써 완전한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 <윤석열차>는 이에 부합한다. 왜 정권에 대한 비판을 그리 고깝게 생각하나?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을 저주하는 만평은 괜찮고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을 비난하면 안되는가? 반성하지 않고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 수구세력의 본성이다. 문체부가 무리수를 감행한 까닭이다. 둘째, 개인의 자율성(automony)을 존중하는 것이다. 각자 자유인으로서 스스로 무엇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윤석열차>를 그린 고등학생도 인간 고유의 자율성을 존중받아야 한다. 공익의 해치는 것도 음흉한 푸닥거리도 아닌 한 윤김씨가 싫어하든 화를 내든 상관없다. 세째, 민주주의에 필요한 공개 토론을 보장하는 것이다(democratic deliberation). 수구세력이 쌍심지를 켜고 <윤석열차>를 시비걸자 많은 시민들이 그 만평을 보고 갑론을박하게 되었다. 숨은그림찾기하듯 자세하게 살펴보았으니 작가의 뜻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수구세력의 난동으로 화룡점정畫龍點睛이 된 셈이다. 허탈한 역설이다.
이쯤되면 윤씨가 툭하면 내뱉는 자유가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나는 자유라 읽고 너는 속박이라 쓴다. 나는 누려야 할 권리고 너는 피할 수 없는 의무다. 나는 힘을 가졌고 너는 갖지 못했다. 나는 이겼고 너는 졌기 때문이다. 고로 나는 언제나 옳고 너는 틀렸다. 나는 진리·정의·공정 그 자체이다. 윤씨의 자유는 그의 만능키다.
참고문헌
- Levmore, S.X., & Nussbaum, M.C. (Eds.). (2010). The Offensive Internet.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같이 읽기
- 박헌명. 2020. "추안무치"와 <달의 몰락>과 계몽군주. <최소주의행정학> 5(10): 1.
- 박헌명. 2016. 무제한 토론 제도와 말이 아닌 말폭력. <최소주의행정학> 1(2): 1-2.
인용: 박헌명. 2022. <윤석열차>의 역설과 표현할 자유. <최소주의행정학> 7(1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