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 함성이 곧 헌법이다." 2016년 11월 도올 김용옥 선생이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글의 제목이다. 도올은 방송에서도 법의 형식으로 문서로 적혀있는 것이 헌법이 아니라 했다. 박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주권자의 뜻을 담고 있는 일체의 것이 헌법이라는 말이었다. 민중의 양심, 민중의 양식良識, 백성의 소리가 이 시대의 철학이고 이 시대의 헌법이다. 기고문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여러분께서 단상에 서 있는 도올을 바라보는 그 가슴에 뭉클거리는 감정, 그리고 뇌리에 떠오르는 모든 일치된 언어, 그것은 바로 하늘의 소리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시대의 철학이요, 이 시대의 정언명령이며, 이 시대의 헌법입니다. 헌법은 조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투쟁으로만 획득되는 민중의 양심이며 양식이며 끊임없이 변하는 괘상(卦象)과도 같은 것입니다"(한겨레신문, 2016. 11.7).
민중의 함성과 강한 민주주의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언어로 기교를 부린 멋진 말이라고 생각했다. 계속되는 토론(ongoing talk)이 없이는 강한 민주주의도 없다는 Barber (1984)와 맥락이 닿아 있다. 현실 문제를 치열하게 다투는 과정에서 그 당시를 살아가는 자들의 간절한 목소리를 시대정신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또 그 시대의 정언명령定言命令을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어야 강한 민주주의다. 법조문에 적혀있든 아니든 상관없는 얘기다. 어차피 백성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헌법은 민주주의에서 오래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조국여식인질극부터 12.3비상계엄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법조인들이 벌인 난장판 활극을 보면서 놀라움을 지나쳐 충격과 공포와 분노로 치를 떨었다. 김학의 성접대 동영상을 보고서도 김학의라 못했던 검사들, 조국 청문회 당일 소환조사없이 배우자를 기소한 검사들, 이재명 선거법위반 파기환송을 기상천외奇想天外로 밀어붙인 대법원장, 그리고 구속기한을 날짜와 시간으로 뒤섞어 반란수괴를 풀어준 판사, 즉시항고를 포기한 검찰총장... 배울만큼 배우고 자칭 사회 지도층으로 옷갖 특혜를 누려온 자들의 처신이 시궁창에 처박힌 짚신짝만도 못하다니... 그동안 5푼도 안되는 판사, 검사, 변호사 미꾸라지들이 끝 간 데 없이 설치더니 나라의 기강을 무너뜨렸다. 법으로 흥한 자들이 법을 망치더니 이제는 법으로 망해가는 과정을 사람들이 생중계로 지켜보고 있다.
법이 아닌 "밥" 양심이 아닌 "앙심"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라고 적고 있다. 헌법재판소법 4조도 마찬가지다. 문맥상 “그 양심”은 헌법과 법률을 벗어날 수 없다. 개인의 가치관, 종교관, 역사관이 아닌 일반 시민의 양식과 양심이다. 제헌헌법에는 “그 양심에 따라”가 없었는데, 1962년 12월 26일 제5차 개헌에서 추가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미꾸라지들은 법이 아닌 “밥”으로, 양심이 아닌 “앙심”으로 법망치를 놀렸다. 사법권 독립을 방패삼아 헌법과 법률을 제멋대로 주물렀다. 또 검사선서는 “나는...공익의 대표자로서 정의와 인권을 바로 세우고 범죄로부터 내 이웃과 공동체를 지키라는 막중한 사명을...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로서...”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공익이 아닌 자신의 출세를 위해 수사와 기소를 망나니 칼처럼 휘둘렀다. 이토록 허망하고 (검사들 스스로도) 듣기 민망한 검사선서라니...
양심일랑 집어치우고 법대로 해라
아직도 판검사 대부분은 제 몫은 다 하고 있다. 하지만 법조계는 그 미꾸라지들을 치죄하기는 커녕 그들만의 세상에서 괴물로 성장하는 토양을 제공했다. 침묵하는 대가로 끼리끼리 잇속을 챙겼다. 학연·지연·혈연을 초월하는 이 바닥의 법연法緣이다. 공범들이다. 스스로 반성하고 자정하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음이다. 이제 사람들은 판검사의 양심과 선서를 믿지 않는다. 기대하지도 않는다. 조국에게 들이 댄 그 잣대로 살아남을 판검사가 있을까? 법치法治를 비웃는 인치人治에서 부처, 예수, 공자인들 무사할까?
이번에 개헌을 하게 되면 “그 양심에 따라”를 집어치우고 “헌법과 법률에 따라 심판한다”로 못박아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오직 법에 따라 국민의 상식과 공익에 부합하는 결정을 내리도록 해야 한다. "사법부의 독립"이 아니라 법관의 독립이 필요하다(판검사의 인사는 독립기관이나 선거로 한다). 법관이든 검사든 강력한 권한에 비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들의 직무에 관련한 공소시효를 없애고 논란이 된 사건에 대해 자신의 판단을 시민들에게 설명하도록 한다(충분히 납득시키지 못하면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
평범한 시민이 주권재민을 실현하는 시대
현행 헌법재판소법 5조와 법원조직법 42조는 재판관과 고위 법관의 자격을 판사, 검사, 변호사로 못밖아 놓았다. 한마디로 사법고시를 통과한 자들만의 성곽을 쌓았다. 하지만 법리를 들먹이며 법을 잘 아는 사람이 판결해야 한다는 핑계로 국민을 속였다.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고 잇속을 위해 양심을 팔고 법을 말아먹었다. 법을 모르는 애들도 국민에게 총칼을 들이대거나 반란수괴를 풀어주면 안된다는 것을 다 안다. 국민들이 밤새워 지켜본 불법계엄인데, 윤석열을 파면하고 처단하는 일이 왜 이리 지난持難한가? 이게 엄청난 법지식이 필요하고 복잡한 고차방정식을 풀어야 할 일인가?
지식 문제도 계산 문제도 아닌 주권자의 결단 문제다. 나라의 중요한 결정은 주권자의 뜻에 따라야 한다. 하지만 고위 법관이나 헌법재판관은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주권자를 깔보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법조문을 돌돌 외우고 다닌다 한들 털이 박힌 앙심이면 다 무슨 소용인가? 뻔한 사건은 인공지능의 법지식이 더 공정하고 정확하게 정의를 말해주는 시대다. 이제는 고시와 무관한 민중의 양심들이 고위 법관이 되고 헌법재판관이 되어 시대정신을 구현했으면 한다. 배심원과 국민여론이 재판을 주도하고 국민이 고위 판검사를 뽑고 민심을 거스르는 판검사와 경찰을 불러내 국민 앞에 세우는 상상이 실현되길 바란다.
참고문헌
- Barber, Benjamin. R. 1984. Strong Democracy: Participatory Politics for a New Age.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인용: 박헌명. 2025. 주권재민 시대의 헌법과 시민 재판관. <최소주의행정학> 10(7):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