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n Young Lee

거창양민학살에서 배우는 12.3친위정변 PDF


월간
 
최소주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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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쪽으로 차머리를 돌렸다. 대병에서 황매터널을 지나 오부를 거쳐 생초로 향하던 길이었다. 10여년 전 거창과 산청을 잇는 그 고갯길을 닦고 있었는데, 이제 그 길을 거꾸로 달렸다. 오른쪽으로 거창사건추모공원이 보였다. 나무가 자라서인지 맑은 햇살에 비친 공원은 제법 근사해진 모습이었다. 폭염때문인지 찾는 발길이 없으니 적막하다. 조금 더 달려서 신원국민학교에 미치기 전에 좌회전을 했다.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과정리 박산朴山골. 1951년 2월 11일 거창양민학살이 벌어졌던 장소다.

거창양민학살사건은 이승만의 광기

가해자는 빨갱이 소탕에 눈이 뒤집힌 이승만 정권의 국군 11사단(최덕신 준장) 9연대(오익경 대령) 3대대(한동석 소령). 가해자는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으로 인근 주민을 신원국민학교에 모은 뒤 공무원 가족을 제외한 517명을 박산골로 몰아넣고 난사했다. 단 세 명만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국군은 5월 9일부터 삼일 동안 덕산리(84명), 대현리(100명) 등을 돌면서 인근지역 양민 총 719명을 학살했다. 박산골 학살장소 표지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여기는 1951년 2월 11일 대한민국 일부 국군이 자기 나라 국민을 집단 학살한 곳이다. 국군 제 11사단 9연대 3대대는 지리산 지역 빨치산 토벌을 구실로 이곳에 진주한 후, 인근 주민 1,000여 명을 강제로 신원초등학교에 모으고 그 중 군인이나 경찰, 공무원 가족들을 형식적으로 골라내고 남은 사람들을 이곳으로 끌고 왔다. 군인들은 이들에게 총을 쏘아 죽이고 시체를 나뭇가지로 덮어 놓고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아직도 골짜기 바위마다 선명히 남아있는 총탄 자국이 그때의 비극을 짐작하게 한다. 이곳에서 희생된 사람은 모두 517명으로 대다수가 어린이, 노인, 여자들이었으며... 이곳에 보존비를 세워 살아있는 자들의 교훈으로 삼고자 한다” (2004. 4).

거창사건추모공원의 웹집에는 “02.10: 한동석은 덕산리 내동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과정리 면소재지로 이동해 군병력을 대현리, 와룡리, 중유리 마을에 투입해 마을마다 가옥은 불질러 태우고 가축과 양식을 강탈하며 무법 천지로 만들어 주민들을 총으로 위협하여 과정리로 몰아가던 중 날이 저물자 와룡리, 대현리 주민 100여명을 탄량골 하천 계곡에 몰아 넣고 총으로 처참하게 학살, 시신 위에 나무가지를 덮고 불을 질러 태워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02.11: 한동석은 10일날 4개 리에서 끌고 온 주민 1,000여명을 신원국민학교 교실에 몰아넣고 굶주림과 추위, 공포에 질려 있는 주민들에게 (인공가 불러라.) 군가 불러라, 밤새도록 교대해가며 광란을 부리다 날이 밝아질 때 주민 517명을 박산골짜기에 몰아 넣고 전투에 사용되는 무기는 모두 사용하여 잔인하게 학살을 하고 피바다를 이룬 시신 위에 마른 나무 가지를 올려놓고 기름을 뿌려 불로 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자세하게 적었다.

거창양민학살, 제주4.3학살, 12.3친위정변

당시 25세였다는 한소령의 9연대(3대대)는 1948년 한라산에서 짐승을 사냥하듯 도민을 도륙한 송요찬 소령의 9연대와 차이가 없다. 인간의 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개인의 일탈이 아닌 권력에 눈이 먼 이승만의 광기(반공)이다. 친일종미로 기득권을 꿰찬 수구들의 빨갱이 낙인과 주술呪術이다. 이들은 사실을 은폐하고, 진상조사를 방해하고, 역사를 왜곡했다. 학살 사실을 말하지 못하게 했고 박산골 현장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3년이 지난 뒤 겨우 유골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승만은 담화문에서 희생자들은 빨갱이 협력자로 군법회의에 넘겨 처형한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계엄민사부장이었던 김종원은 국군 1개 소대를 인민군으로 위장하여 국회조사단을 습격했다. 1949년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이 반민특위를 습격한 솜씨 그대로다. 1960년 11월 18일 박산합동묘역위령비를 세웠으나 이듬해 6월 25일 박산묘소는 파헤쳐지고 위령비문은 정으로 훼손되고 땅에 묻혔다. 일이 커지자 책임자들은 국방장관을 비롯하여 소대장까지 처벌되었지만 얼마 뒤 사면으로 풀려나 호의호식했다. 50년이 지난 2004년 3월 특별법이 통과되었지만 “거창양민학살”은 “거창사건”이 되어버렸다. 수구세력의 추잡한 몽니와 뭉개기와 집요한 말공작의 결실이었다.

제주4.3학살도 다를 것이 없다. 2000년 관련 4.3특별법이 통과되고 2003년 제주4.3평화공원이 조성되기 전까지 피해자들은 숨죽이고 지냈고 가해자들은 떵떵거리며 살았다. 예컨대, 당시 제주 전투사령관이었던 유재흥 대령은 한국전쟁에서 국군 2군단과 3군단을 전멸시켰지만(그래서 군작전권을 미군에게 넘겨줬지만) 국방장관까지 해먹었다. 또 제주4.3의 참상을 고스란히 기록한 다랑쉬굴(1992)을 발굴하여 알린 자들은 쫓겨다녀야 했고, 공산주의자(남로당)들의 폭동이라는 수구세력의 말폭력을 견뎌야 했다. 법과 무관하게 자행된 수구기득권의 더러운 패악질이었다. 아무리 공산주의자라 해도 양민을 개·돼지 사냥하듯 잡아죽여서야... 이승만을 등에 업은 수구기득권의 광기에는 벌거벗은 힘과 잇속이 용솟음칠 뿐, 법과 양심은 없었다. 이런 광인들에게 빨갱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면 2024년 김여사 정권의 12.3친위정변은 어떠한가? 약 75년이 지났지만 수구기득권의 정신줄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예술과는 담을 쌓은 자들이니 창의성이 빵점이다. 식상하다. 윤석열은 “지금 우리 국회는 범죄자 집단의 소굴이 되었고, 입법 독재를 통해 국가의 사법·행정 시스템을 마비시키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전복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 국회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붕괴시키는 괴물이 된 것입니다. ... 저는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라고 발표했다. “종북”을 빼면 제주4.3학살(1948)과 거창양민학살(1951)에 관한 이승만 정권(미군)의 발표와 별반 차이가 없다. 법절차, 논리, 상식, 윤리와 무관한 “내 맘대로”일 뿐이다. “나, 재 시러... 치워” 수준이다.

친위정변이 성공했다면 "서울12.3학살"이었을까?

친위정변이 허망하게 실패했길래 망정이지 성공했다면 결과는 참혹했을 것이다. 먼저, 수거대상이 된 자들은 구금시설에서 고문을 당하고 손발이 묶인 채 배 안에 차곡차곡 실려 연평도 근해에서 폭사당했을 것이다. 이재명, 우원식, 한동훈, 조해주, 조국, 양경수, 양정철, 이학영, 김민석, 김민웅, 김명수, 김어준, 박찬대, 정청래, 그리고 부정선거에 관여했다고 지목된 김명수, 조해주, 양정철, 권순일. 이 명단은 친위정변의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공公이 아닌 사私이고, 법이 아닌 감感이고, 사실이 아닌 사심이고, 명분이 아닌 명신의 히스테리다. 어쩌면 이들은 죽기 전에 김명신 앞에 개처럼 끌려가 역사에 길이 남을 해괴한 형벌을 치욕으로 받았을 것이다.

둘째, 국회에 몰려가 계엄군에게 저항한 시민, 야당 의원, 보좌관, 계엄해제에 동의한 여당 의원 등은 처단되었을 것이다. 영현백도 아까우니 김포(쓰레기 매립지)나 난지도에 쌓아놓고 총과 폭탄으로 날려버렸을는지 모른다. 노상원 수첩에 나와 있다는 잔혹한 처단방법을 상상해 보라. 이렇게 죽어갔을 시민의 수가 1만 명에 이를 수도 있다 하니 제주4.3학살에 견줄 수 있음이다. 만 명의 기일이 똑같은 그 참혹한... 하마터면 “서울12.3학살”이 될 뻔했다.

세째, “서울12.3학살”로 처단된 자들에 대한 얘기를 수십년 간 감히 꺼낼 수 없었을 것이다. 말을 듣지 않는 그들의 지인, 친인척, 언론인, 학자들은 빨갱이로 몰려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물고기밥이 되었을 것이고 처자식들은 죄인이 되어 취직은 커녕 동네에서 발붙이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행여 매장이라도 되었다면 유골을 수습하는데도 수 년이 걸렸을 것이다. 시민을 학살해놓고 그 지역을 계엄령으로 밀봉했을 테니 말이다. 유족들은 영정도 명패도 놓지 못한 채 원없이 곡도 못하고 눈물을 삼켜야만 했을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묘역과 위령비가 세워져도 오래 가지 못했을 것이다.

네째, 친위정변에 성공한 정권은 종북 빨갱이들이 부정선거를 획책하고 입법독재로 자유민주주의를 뒤엎은 것이 사실이고 비상계엄을 통해 만여 명의 반국가 범죄자들을 법에 따라 일거에 척결했다고 자랑스럽게 발표했을 것이다. 선거관리위원회 직원들이 줄줄이 방송에 끌려나와 부정선거를 고변하고 석고대죄했을 것이다.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요란하게 대국민 발표를 한 이상 안 믿으면 종북으로 몰고 빨갱이로 몰아 매장시키면 그만이다. "너는 법대로, 나는 멋대로"인 자유민주주의 아닌가. 미치광이들이 벌이는 난장판이 된다.

다섯째, 비상계엄에 가담하여 학살을 자행한 자들은 승승장구 진급과 승진을 거듭했을 것이다. 분에 넘치는 권력에 비례하여 수많은 뇌물을 받아 치부했을 것이다. 현재 비상계엄에 관련되어 구속되었거나 수사와 재판을 받고 있는 자들의 운명은 이렇게 달라졌을 것이다. 계엄에 소극적이거나 저항한 자들은 빨갱이와 내통한 죄로 총살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나랏일이 엉망진창이 되든 말든 그들만의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밤새는 줄을 몰랐을 것이다. 사라진 야당의원들의 자리는 보궐선거를 통해 정변세력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들로 채워졌을 것이다. 군대, 검찰, 경찰, 방송, 언론, 행정부는 물론 입법부와 사법부까지 장악한 김여사 제국은 이렇게 완성되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훗날 친위정변이 법으로 단죄된다고 해도 희생자와 유족들에 대한 피해보상은 50년 후에야 시작될 것이다. 윤건희 세력들이 끊임없이 훼방을 놓고 말공작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종북이다, 빨갱이다, 반국가세력이다... 뭘 하자고 해도 “야당과 유족들이 징징대고 국제사회에서 비난하니까 뭐라도 하긴 해야 하는데...” 라면서 떨떠름해 했을 것이다. “12.3사건추모공원”을 세워도 희생자들이 민주주의를 수호하다 억울하게 죽었음을 결코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그런 비문이 새겨졌다 해도 정으로 뭉개져서 땅에 묻혔을 것이다.

그러니 12.3친위정변을 멈춰 세운 시민들이, 국회의원들이, 장병들이 얼마나 장하고 고마운가?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해낸 것인가? 깨어있는 주권자의 사자후獅子吼에 수구정변세력은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무너졌다. 내란세력을 단죄하는 일이 더디고 힘들지만 지금 뚜벅뚜벅 사필귀정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운 까닭이다.

박산골로 향한 발걸음은 최소한의 부끄러움

1951년 거창양민을 몰살시킨 9보병연대는 1948년에는 제주 4.3학살을 자행한 흑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승만 정권의 토벌작전에 회의적이었던 김익렬 중령이 해임되고 선량들에게 총구를 들이 댄 송요찬의 9연대 얘기다. 이 부대는 1975년 11(기동)사단으로 예속되었다. “젓가락사단”으로 알려진 부대다. 부대 역사관에 빨갱이 소탕 업적으로 분칠한 부대다. 박산골로 향한 발걸음은 아마도 한때 이 부대를 스쳐 지났던 장교의 최소한의 부끄러움이리라. 국민의 군대에게 마른 하늘에 날벼락으로 참혹한 죽음을 당했던 분들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위로 말씀을 올린다. Sojeong

같이 읽기

인용: 박헌명. 2025. 거창양민학살에서 배우는 12.3친위정변. <최소주의행정학> 10(9):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