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많은 세상이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뀐 탓일까? 그동안 억눌렸던 민의가 민주화에 힘입어 못물처럼 터져나온 것일까? 인터넷과 사회매체 덕에 누구나 쉽게 언제 어디서나 말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말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열려있고, 사회계층을 가리지 않는다. 순시간에 세상 구석구석에까지 퍼진다. 말의 해방구에서 즐기는 무한대의 자유다. 하지만 너도 나도 쏟아낸 말의 홍수에 휩쓸려 허우적거리고 있다. 옳은지 그른지, 예쁜지 미운지, 필요한지 아닌지 따질 겨를도 없다. 한번 내뱉은 말은 바로잡기도 주워담기도 어렵다. 무지막지하게 밀려드는 말의 파도가 해일처럼 사람들을 집어삼키고 있다.
멀쩡한 화자, 청자, 말이 핵심이다
말하기(의사표시)는 자신이 가진 의견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일이다. 먼저 전달하고자 하는 느낌이 괴어 있어야 한다. 남의 말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난 솔직한 의사여야 한다. 거짓이 아니어야 한다. 필요한 말이어야 한다. 또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서로 호응해야 한다. 서로 의사교환을 원하고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뻔한 거짓말과 농담이 진솔할 수 있는 이유다. 화자나 청자 한 쪽이라도 의지가 없거나 불순다면 청문회와 국정조사에서 보는 “백날토론”일 뿐이다.
멀쩡한 화자와 청자가 있고 멀쩡한 말이 있다면 말을 전하는 매체(media/channel)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직접 얼굴을 맞대든, 편지든, 전화든, 글대화든, 영상통화든 다를 바 없다. 컴퓨터와 통신 기술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말 자체보다 말을 전하는 매체에 관심을 집중한다. 최초로 발매된 아이폰을 손에 넣고 승강기 안에서 뛸 듯이 기뻐하던 신입 직원이 생각난다. 최신 스마트전화와 스마트시계라며 자랑하는 주위 사람들... 기기의 성능에는 이견이 없지만 그들이 그 기기들을 얼마나 잘 활용하는지는 의심스럽다. 아이폰이 부모형제들에게 안부를 더 자주 묻게 할까? 스마트폰이 사람들을 정말 스마트하게 만들 수 있을까? 모바일 기술이 언제 어디서든 내가 원하는 통화를 하게 해줄까?
기기의 성능과 사람의 행태는 전혀 다른 문제다. 사람과 말이 그대로인데 어떻게 기술이 말하기를 바꿀 수 있단 말인가? 마음이 없는 자는 아무리 비싼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어도 전화하지 않는다. 의무나 예의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편의라는 이름의 자유를 취하기 때문이다. 기기는 24시간 대기하지만 통화가 엇갈리는 일은 예전과 마찬가지다. 기기는 갈수록 스마트해지는데 사람은 그러하지 않다.
싸구려 말, 음흉한 말, 역겨운 말
이러한 환경에서 싸구려 말이 활개친다. 멀쩡한 말이 아니다. 간절한 느낌이 없다. 정겹거나 유쾌하지 않다. 미덥지 않고 종잡을 수 없다. 이기적이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극빈하기 때문이다. 대화의 상대가 아니라 무조건 무찔러야 하는 적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진심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청자는 진심을 읽어내는데 게으른 탓이다. 그러니 멋있고 감동있는 말을 찾아보기 힘들다. 말장난은 장마비로 퍼붓지만 진심은 가뭄에 콩나듯 한다.
싸구려 말은 무의미하거나 과격하다. 음흉하거나 역겹다. 의미없는 말은 불필요한 말이다. 매체가 있으니 그냥 하는 말이다. 사회매체가 이러한 과소비를 부추기고 있다. 음흉한 말은 “가짜뉴스”처럼 사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뒤섞어 상대방을 몰아넣고 공격하는 말이다. 정치꾼이나 기자꾼이나 검사꾼들의 말법이다. 인간적인 실수도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다. 관용이고 뭐고 없다. 짜깁고, 부풀리고, 비틀고, 없는 일도 만들어 소설을 완성한다. 대장동 “그 분”이나 “윗어르신”은 노벨조작상감이다. 역겨운 말은 사실 여부를 떠나 사람이면 하지 말아야 할 소리다. 다짜고짜 빨갱이니 파렴치범이라니 미꾸라지라고 저주를 퍼붓는다. 당대표가 “재명아 ... 나랑 싸우자”라니... 정치가 아니라 패악이다. 하지만, “전과4범 좌빨”이 집권하자 공산화는 커녕 자본주의 꽃이라는 증시 지수가 삼천에서 구천을 찍었다. 정적을 “확정적 중범죄자”라고 낙인찍은 “법주정뱅이”가 오히려 내란죄 등으로 사형과 무기 사이에서 맥주병마냥 꼴깍꼴깍 하고 있다. 사필귀정이라 했던가.
언제나 과격한 말을 경계해야 한다
과격한 말은 경우에서 벗어나는 말이다. 못들은 척해도 되는데도 굳이 한마디를 던지거나 지나친 표현으로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든다. 어떻게든 상대방을 흔들어 궁지로 몰아넣으려는 수작이다. 못된 말버릇이자 말폭력이다. 예컨대, 친문, 친명, 친청 등으로 제멋대로 편을 가르거나, 지방선거에서 패했으니(시도지사 12대 4가 패배인가?) 당대표를 사퇴하고 선거에 불출마하라고 요구한다. 또 “국민은 영원하고 정권은 짧다”를 시비건다. 오해인가, 의도된 난독증難讀症인가? 그러면 김민석은 영원하고 정청래는 짧아야 하는가? 계엄해제 표결에 참여하지 못한 김민석을 야박하게 몰아세우는 것도 경우가 아니다. 비상 계엄을 견제해왔던 사람아닌가. 선거를 앞두고 불쑥 선호투표제를 도입하자는 것도 마찬가지다. 당사자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냥 하던 대로 하면 그만이다.
과격한 말은 대의를 저버리고 눈앞의 권력을 챙기고 보려는 자들의 중얼거림이다(1983: 255). 동지의 허물을 들추어 끊임없이 파열음을 낸다. 적의 언어로 동지의 뒤통수를 친다. 누구는 “사법리스크” 누구는 “자기정치” 누구는 “조로남불” ... 조직이 흔들리면 책임을 물어 정적을 끌어내린다. 서로를 원망하게 만드려는 적의 술책에 놀아난다. 단순 과격을 넘어선다.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면 선거에 비협조(방해)하고 결과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 씌운다. 6.3 지방선거를 돌아보라. 후단협이나 “비명횡사”들이 한 짓이다.
“공은 동지들에게 돌리고 불리한 것은 자신이 담당”하라 했다(1996: 429). 동지 간의 단결과 연대가 약자들의 중추中樞다.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언행을 항상 경계하는 이유다. 선거에서 동지의 흠이 아닌 자신의 장점(정견)으로 겨뤄야 한다. 경우에 맞게 자신의 진심을 말해야 한다. 싸구려 말보다는 침묵이 금이다. 과격하거나 음흉한 말을 하고, 그것으로 잇속을 챙기고, 수구기득권이 호응해주는 자를 예의주시해야 한다. 꼭 심판해야 할 대상이다.
인용: 박헌명. 2026. 정치인의 말하기와 과격한 말. <최소주의행정학> 11(8):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