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정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비폭력은 주먹을 내려놓고 말로 하자는 것이다(1986: 318). 이문영(2008)은 “무서웠을 때 내가 한 말은 적의 이성이 거절하지 못하는 최소의 말”(491쪽)이라 했고, “정부도 거절하지 못하는 말을 하되 말만 한다”라고 적었다(497쪽). 하지만 비폭력의 참뜻을 이해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물리력을 사용하지 말고 거친 말을 내뱉지 말라는 뜻일까? 어떤 상황에서든 화내지 말고 성내지 말라는 소린가? 노무현씨처럼 최루탄이 터져도 도망가지 않고 길바닥에 앉아 연좌시위를 계속해야 하는가? 전투경찰들이 쇠파이프를 들고 달려들거나 군인들이 총을 난사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가만히 앉아서 품격있게 군자왈 맹자왈 하다가 맞아죽는 것이 비폭력인가? 이런 상황에서 약자는 어떻게 비폭력을 실천하고 최소의 말을 해야 하는가? 지난 호(2권 11호)에 소개한 빈센트 오스트롬 선생님의 성내기는 폭력인가, 비폭력인가?
소정 선생님의 성내기
소정 선생님은 인자하고 인간미가 있는 분이다. 하지만 비폭력을 강조하시는 선생님도 화를 내실 때가 있었다. 선생님의 대학원 수업에서 나는 기말과제로「자전적 행정학」(1991)을 비판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비폭력, 개인윤리, 사회윤리, 자기희생이라는 초월윤리를 조직, 정책, 인사, 재무에 적용하는데 무리가 따르는 대목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며칠 후에 선생님께서 일부러 내가 공부하는 방으로 찾아오셔서 역정을 내셨다. 오래 전부터 갈고 다듬어 온 초월윤리라는 분석틀을 논거없이 비판했다며 불편한 속내를 말씀하셨다. 당시 선생님의 초월윤리를 깊이 있게 이해했다고 할 수 없었기에 그 노여움을 달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선생님의 평소 모습이 아니어서 당혹스러웠다.
자서전인「겁많은 자의 용기」(2008)에는 선생님의 성내기 몇가지가 소개되어 있다. 일기로 적은 1983년 8월 31일 사건은 다음과 같다.
“곧 택시로 대학교로 해 기독교빌딩 앞에 차를 세운다. 마침 현아 엄마와 안박사 부인이 현관에 나오면서 지금 기동대가 농성 중인 네 분을 다 데리고 갔다는 것이다. 오후 세 시 경에 200명이 들이닥쳐서. 그러니 피하라는 것인데 연동교회 쪽으로 한 20미터도 걷기 전에 뒤에서 사복 경찰들이 와 나를 잡는다. 내 차로 간다니까 자기네 차로 집으로 모신다는 것이다. 북부서 강 형사가가 나를 잡는다. 북부서 정보과에 현아 엄마가 같이 간다. 계장실 하나에 함 선생님이 깊이 있고 생각하시는 표정으로 앉아 계신다. 문 목사님이 독이 나서 과 사무실에 앉아 계신다. 나는 과장실로 안내된다. 조금 있다가 형사가 와서 과장보고 ‘문 목사가 반공계로 자리를 옮기자 하니, 나를 짐짝같이 끌고 왔으니 끌고 가라고 안 움직여요’한다. 과장이 ‘뭐? 죄인이 무슨 큰소리야?’라고 악을 쓰며 나간다. 나는 길길이 악을 쓴다. ‘이 깡패 놈아 네가 죄인이지 누가 죄인이냐? 죄를 졌으면 영장을 가지고 와야지, 집에 데려다 준다고 해놓고 경찰서에 끌고 온 놈이 깡패이고, 너 과장이란 것은 깡패 두목 아니냐!’ 마침 박용길, 박영숙, 김석중이 밖에 있어 야단들이다. 밥을 안먹고 수사에 안응한다” (2008: 400-401).
또한 수감중인 교도소에서 더운 물을 달라며 플라스틱 베개를 두드린 사건은 이러하다. 교도관과의 대화에 주목해보자.
“나는 습관대로 추운 겨울날 어느 저녁에 심호흡과 요가를 했다. 몸에 땀이 흠뻑 났다. 나는 냉수마찰을 하고 나서 자리를 깔고 취침을 했다. 밤중에 잠이 깨더니 갈증이 났다. 그래서 저녁에 받아둔 물을 마셨다. 몸이 갑자기 떨리기 시작하더니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았다. 나는 복도로 난 문을 똑똑 두드렸다. 교도관이 왔다. 따뜻한 물 한 모금을 달라고 말했다. 그는 더운물이 없다고 말하고는 가버렸다. 나는 또 문을 똑똑 두드렸다. 그가 왔다.‘만일 댁에서 지금 물을 마시고 싶다면 어떻게 하세요?’‘저 난로에서 끓여 마시지요.’‘그러면 저에게도 난로에서 끓여 주세요.’‘안됩니다.’그와 나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갔다. 내가 더운물을 못 얻어마시는 것은 인도주의 정신에 어긋나는 일이며 갈리리 교회에서 성찬을 함께 한 동료들도 나처럼 찬물을 마시고 덜덜 떨 것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더운물 한 모금은 인간이 가져야 할 최소라고 생각했다. 생각한 후에는 행동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나는 다시 문을 두드렸다. 교도관이 안왔다. 그러자 나는 플라스틱 베개로 쇠문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교도관이 달려왔다. 다시 더운물을 달라고 말했다. 물을 안주겠단다. 그러면 더운물을 달라는 청원을 교도소장에게 하겠으니 교도소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말했다. …” (2008: 302-303).
「자전적 행정학」(1991)에 나오는 “박정희 노래” 사건은 강의시간에도 말씀하신 것으로 기억한다. “그럼 박정희씨의 노래라고 하면 되겠느냐”며 놀리는 선생님의 반문이 들리는 것같다.
“서울구치소에서 순천교도소로 이감가기 직전 어느날 새벽에 느닷없이 스피커에서 새마을 노래가 흘러나오는 異變이 생긴다. 이런 노래는 안부르기로 18개 조항에 약속이 된 것인데 버젓이 스피커에서 노래가 흘러나오되 그것도 흘러나오는 노래 중 제일 먼저 흘러나오지 않는가? 약속위반이다. 이렇게 약속은 강자가 어긴다. 정부가 지켜야 법의 지배가 가능해진다. 나는 이 때에 내 애용의 무기 플라스틱 목침을 또 사용하면서‘박정희 노래 집어치워라!’를 외친다. 더운 물 달랠 때같은 소동이 난다. 보안과장과 내가 다음과 같은 말을 나눈다. 과장: 약속을 어겼다고 박정희 대통령이라고도 않고 박정희 노래가 뭡니까? 나: 아니, 과장님은 슈벨트의 노래를 슈벨트의 노래라고 하지 슈벨트씨의 노래라고 합니까? 과장: … ” (1991: 352-353).
비폭력은 무서울 때에(나서면 큰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 상황) 꼭 해야 할 말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1) 자신의 분석틀을 비판한 보고서를 보고 화를 내셨고, (2) 부당하게 시민을 연행하고 죄인취급을 한 경찰의 행동에 악다구니를 부리셨고, (3) 겨울에 뜨거운 물을 주지 않는다며 플라스틱 베개로 쇠문을 사정없이 두드리셨고, (4) 교도소에서 틀어 놓은 “박정희 노래”를 집어치우라고 외치셨다. 베개로 쇠문을 두드린 것은 물리력을 동원한 경우이고 나머지는 거친 언어를 사용한 경우다. 사람을 때린 것은 아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폭력이라면 폭력인 셈이다. 오스트롬 선생님의 성내기는 고객으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항의를 한 것으로 (2)번 경우에 해당된다. 그러면 어느 경우가 초월윤리의 비폭력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위급한 상황은 피하고 본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달리 어찌 해볼 도리가 없을 때에는 일단 피하고 보는 것이 상책이다. “현실적 이상주의”는 (특히 약자의) 철저하고 엄격한 현실이해를 필요로 한다(1986: 138, 298). 모든 생물은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이솝우화」에 따르면 약자가 포악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한 동물을 피해서 살거나, 지혜를 갖거나, 약한 동물끼리 단결을 해야 한다(1980: 366). 당장 눈앞으로 쏟아지는 총칼을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내는 일은 비장할지는 몰라도 비폭력과는 관련이 없다.
저항권 행사는 폭력이 아니다
비폭력은 평화라는 말뜻에서 유추해볼 수 있다. 평화스럽다는 쿠데타나 국민의 난동이 없는 것을 말하는데, 난동은 “승리에의 접근이라기보다는 상대방의 강경화에 구실을 주는 단순하고 감정발산적인 폭력행위”이다(1986: 297). 따라서 “4·19와 같은 저항권의 행사라든가 만주에서의 독립군 활동과 같은 정쟁(政爭)”은 난동이 아니다. 또한 때리지 말고 말로 하는 사회가 민주 사회인데, (1) 폭력 정치에 대하여 저항하여 말할 수 있는 자유, (2) 피치자가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자유, (3) 치자와 피치자가 서로를 구속하는 약속(계약이나 법)을 만들어내는 자유가 필요하다(1991: 317).
결국 주권자로서 저항권을 행사하는 것은 난동이라 할 수 없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무력으로 저항한 독립군과 적군의 수뇌부를 암살한 의병 중장 안중근를 난동꾼으로 볼 수 없다. 맥락없이 물리력 행사만 강조하여 물타기하려는 친일 매국노들의 음흉한 논리다. 영장없이 거짓말로 시민을 경찰서로 연행하고 범죄자 취급을 한 경찰의 위법행위에 저항한 소정 선생님의 성내기는 폭력이라 할 수 없다. 가져야 할 최소를 요구한다
따뜻한 물 한모금이라는 인간이 가져야 할 최소를 누리지 못하거나 고객으로서 최소한의 대우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기본이나 최소를 요구하는 것은 폭력이라 할 수 없다. 그 최소는 꼭 필요한 것이어서 양보할 수 없다. 교도관이든 수감자든 인간인 이상 따뜻한 물 한모금은 최소라 할 수 있고, 바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기에 쇠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당장 문 목사가 경찰에게 죄인으로 낙인찍혀 해코지를 당하게 된 마당에 가만히 지켜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박정희 노래”를 틀지 말라는 것은 재소자들이 요구한 최소인데, 이 약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어겼기 때문에 사달이 벌어진 것이다. 최소한 약속은 지키라고 플라스틱 베개를 두드린 것을 폭력이라 말하기 어렵다. 한편 누차례 지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고객의 물건을 성의없이 바구니에 던지는 점원을 꾸짖고 관리자에게 항의한 오스트롬 선생님의 성내기 역시 폭력이라 할 수 없다. 누가 봐도 이러한 요구는 거부될 수 없는 보편성과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선생님의 초월윤리를 비판한 보고서를 보고 발끈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네 단계로 이루어진 초월윤리는 선생님께서 평생을 두고 갈고 다듬은 생각틀인데, 타당한 근거가 없이 비판을 받았다고 느끼셨을 터이다. 다른 것이었다면 몰라도 지키고 싶은 분석틀 자체에 대한 비판이었기에 그토록 민감하셨을 것이라 생각한다.
최소한의 행동이어야 한다
성내는 이유와는 별개로 최소한의 행동이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이문영(1986)은 “안할 것은 세상없이 무서워도 안해라”고 학생들에게 권고하였다. 또 그 상황에 맞는 최선의 선택이어야 한다. 비폭력은 말의 형식을 빌린 폭력의 행사가 아니라고 했지만(2001: 246), 긴급피난이나 정당방위 등과 같은 상황은 예외라고 할 수 있다. 거친 언사도 약자를 방어하는 약이 될 수 있다.
선생님은 보고서 내용에 대해 화를 내셨지만 사실 항의에 가까운 반론이었다. 손찌검을 포함한 일체의 물리력을 사용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문 목사가 죄인처럼 끌려갈 수 있는 위급한 상황에서 경찰의 부당함을 강하게 지적하고 법에 따라 시민을 대우하라고 요구하였다. 그 상황에서 점잖게 경찰관직무집행법이나 형사소송법을 언급하며 과장을 타일렀더라면 어떠했을까? 어쨋든 경찰을 때리거나 무기를 빼앗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안했다. 다만 법에 나와 있는 대로 수사에 응하지 않음으로써 항의를 이어갔다.
또한 더운 물이라는 긴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베개로 쇠문을 두드렸을 뿐이다. 조용히 두드려서는 교도관이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히지만 벽이나 문을 부수거나 물건을 내던지거나 고함을 지르지는 않았다. “박정희 노래” 사건에서 사용된 무기는 플라스틱 베개였을 뿐이다. 요구 내용도 상식에 맞는 것이었고 대응도 철저하게 비폭력이었다. 만일 보안과장에게 “박정희xx 노래”나 “독재자의 노래”라고 대꾸를 했더라면 전혀 딴판이 되었을 것이다.
오스트롬 선생님도 지팡이로 도망가는 점원을 가리키기는 했지만 점원이나 관리자에게 휘두르지는 않았다. 분하다고 울고 불고하지 않았고, 바닥에 드러눕지 않았고, 보상을 하라며 돈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고객으로서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에 대해 강하게 항의를 했을 뿐이다.
약올림의 미학
Park (2016)은 초월윤리의 비폭력이 의도치 않은 약올림 효과가 있다고 지적했다(107쪽). 강자가 자제력을 잃고 계속 폭력에 의존하가다 끝내는 스스로를 망가뜨리도록 유도한다. 이러한 약올림은 비폭력의 귀결이지만 자칫 “말의 형식을 빌린 폭력”이 되기 쉽다. 폭력과 비폭력의 경계를 넘나드는 미묘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증거와 논리를 갖추지 않고 상대방을 헐뜯는 것은 비폭력도 약올림도 아닌 그저 어리석은 짓이다. 철저하게 비폭력으로 대응하면서 상대방의 헛점을 예리하게 파고 들어야 한다. “박정희 노래”가 뭐냐는 보안과장의 말에 “슈벨트의 노래를 슈벨트의 노래라고 하지 슈벨트씨의 노래라고 합니까?”라고 답한 것은 약올림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이문영(2008)은 재판을 받으면서 “검사의 화를 돋워 미치게 만들고, 나는 길게 말하고, 검사가 결재받아 오지 않은 것을 물음으로써 악한 정권의 본색이 내 질문으로 폭로가 되게” 하는 전략을 취했다(296쪽). 법대 교수이면서 왜 국민투표로 결정된 헌법을 비방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그 말 잘 하셨어요. 검사는 어느 대학 법대를 나왔는지 모르겠는데, 민법 총칙 시간에 무효의 의사표시라는 것을 안배웠어요?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는 무효예요. ...검사님, 댁에서 말하는 국민투표 때에는 중앙청 앞에 탱크를 세워놓고 국투표를 해 국민을 협박했는데, 어찌 그 국민투표가 유효해요?”라고 답했다(297쪽). 상대방의 어설픈 공격을 바로 되치기하고 약을 올려 평정심을 잃게 만든 “아름다운 비폭력”이다.
소정의 성내기는 비폭력이다
처음에 나는 소정 선생님이나 오스트롬 선생님께서 화를 내신 것 자체가 당혹스러웠다. 비폭력을 어찌 이해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소정 선생님의 성내기는 저항권의 행사이거나 누려야 할 최소를 요구한 최소한의 행동이었다고 본다. 비폭력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약올림의 미학까지 갖추었다. 마찬가지로 오스트롬 선생님의 성내기 역시 비폭력 구도에서 행사된 정당하고 최소한의 요구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Park, Hun Myoung. 2016. Moon-Young Lee’s Transcendence Ethics in Conflict Management: Lee’s Nonviolence, Conflict Episode, and Principled Negotiation. World Environment and Island Studies 6(2): 99-108.
인용하기: 박헌명. 2017. 소정 선생님의 성내기는 비폭력인가? <최소주의행정학> 2(12): 1-2.